지난 2월, 재일조선인들의 역사와 발자취를 찾으러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재일조선인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디아스포라로 꽤 많이 알려져 있죠. 저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접해 왔고, 관심도 많았지만, 일본 현지를 직접 찾아가 재일조선인들의 문화와 삶을 살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현장을 직접 보고 듣는 경험은 전혀 다른 차원의 깨달음을 안겨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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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먼저 ‘재일조선인’이라는 표현에 대해 여전히 흔한 오해가 존재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아직도 ‘재일조선인’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국적을 갖고 있거나 그 지역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더라구요.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하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강제동원되었거나 혹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일본 패전 후 1947년 일본 정부가 외국인 등록을 시행할 당시 국적을 ‘조선’이라고 신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당시 한반도는 분단된 상태에서 남북 모두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므로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은 국적을 식민지로 전락하기 이전의 ‘조선’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북한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2세, 3세로 이어진 세대들이 다양한 정체성과 입장을 갖고 있으며, 비교적 최근에 일본으로 이주한 ‘뉴커머’들까지도 포함해 일본에 있는 한인(조선인) 공동체는 점점 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의 역사와 경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동아시아의 소중한 공동 기억이자 귀중한 역사임이 분명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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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찾은 곳은 오사카에 있는 통국사(統國寺)라는 절이었습니다. 오사카의 조용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이 절은 단순한 불교 사찰 그 이상입니다. 통국사는 1970년대 재일조선인들이 직접 돈을 모아 세운 재일조선인들의 절입니다. ‘통국(統國)’이라는 이름에서부터 그들이 간직했던 염원이 묻어납니다. 비록 고국은 분단되어 있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통일된 조국을 꿈꾸고자 했던 그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조용한 절 안에 들어서면 먼저 오른쪽으로 베를린 장벽이 눈에 띕니다. 다소 위압감을 주는 파손된 베를린 장벽은 정갈한 사찰의 경내와는 다소 불화하는 듯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독일 분단과 통일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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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에는 제주 4·3 희생자 위령비와 무연고자 위령탑이 나란히 서서 일본 근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사카에는 제주 출신 재일조선인들이 특히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제주 4·3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오사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제주 4·3 사건은 오랜 시간 금기시되어 왔다고 하네요. 참으로 슬픈 역사죠. 그러다가 1998년에 이르러서야 첫 위령제가 열렸고, 2018년 70주기를 맞아 위령비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옆에 있는 무연고자 위령탑은 일본에 강제동원되었다가 결국 고국으로 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한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으로, ‘평화기원’이라는 글과 함께 한반도 지도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서 평화와 통일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가는 한국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절 안쪽에는 일본의 다른 절과 다름없이 꽤 큰 규모의 묘지가 있었습니다. 묘비만 봐도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묘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통국사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일본에서 잊히고 지워지기 쉬운 존재들을 묵묵히 기억해가는 공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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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오사카 코리아타운 백제문, (우)코리아타운 탕후루 가게 / 출처: (좌)wiki commons, (우)박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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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오사카의 코리아타운입니다. 넓지 않은 시장 골목 입구에 있는 백제문(百濟門, 쿠다라문)을 지나면 치킨집, 호떡집, 김치전문점 같은 익숙한 풍경들이 반겨줍니다. 약 500m에 걸쳐 늘어선 이 골목은 과거 ‘조선시장’으로 불리며 재일조선인들이 식재료를 사고팔던 생활의 터전이었습니다. 과거 재일조선인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서 오사카에서도 허름한 동네에 모여들어 판잣집에 살며 서로를 의지했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 탓에 일본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이곳을 ‘위험한 조선인 마을’로 낙인찍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는 서울 대림동 차이나타운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일부 편견과도 닮아 있지 않을까요. 재일조선인들은 억압과 차별 속에서도 끈기 있게 문화를 지키고 뿌리를 내려 지금과 같은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지금은 코리아타운이 한류와 함께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도 바뀌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곳에서 본 탕후루 가게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가게를 보면서 ‘유동하는 동아시아의 경계’를 체감했달까요. 일본 코리아타운에 있는 탕후루 가게에서 탕후루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꼰대스러운’ 일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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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한쪽에는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2023년에 개관한 단정한 모습의 역사자료관 앞에는 ‘공생의 비’가 수문장처럼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역사자료관에는 오사카 코리아타운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빼곡히 모여 있어서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었고, 한쪽에는 조그만 카페에서 커피 향기가 낭만적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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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차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교토 우토로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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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교토에서 재일조선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우토로 마을에 갔습니다. 우토로 마을은 생각보다 도심에서 꽤 떨어진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주변 마을과 별 다르지 않았지만, 이곳은 차별과 저항, 생존과 연대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었습니다. 우토로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부터 일본 정부가 군용 활주로 건설을 위해 조선인들을 동원하면서 생겨난 마을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딱히 돌아갈 곳이 없던 조선인들은 이곳에 남아 수십 년간 상하수도 시설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비록 생활 환경은 열악했지만 직업과 주거, 생활 각 방면에서 차별당하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우토로 마을은 서로 도와가며 생활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 줬습니다. 그러던 중 우토로 마을의 토지가 일본의 한 민간 회사로 넘어가면서, 주민들은 졸지에 ‘불법점거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다행히 이 문제가 한국에 알려지며 2007년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우토로 토지의 일부를 매입했고, 주민들은 강제철거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지금은 공동주택이 들어서고, ‘우토로 평화기념관’도 건립되어 방문자들에게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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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평화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마침 할머니들이 농악을 연습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풍물패에서 장구와 북을 치고 있는데, 먼 이국땅에서 우리 농악을 들으니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에 그 어떤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우토로 평화기념관은 우토로의 과거를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야를 확대해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학살을 알리는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토로의 평화와 인권이 동아시아로, 또 다시 팔레스타인과 전세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평화’나 ‘인권’이라는 말이 단지 아름다운 구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저항과 연대, 그리고 행동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우토로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우토로 마을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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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감독의 어머니를 통해 해방 이후 제주 4·3 사건 등 한반도와 가족 내의 이념 갈등을 다룬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박치기>(2005) 1960년대 교토를 배경으로 한 재일조선인 고등학생과 일본인 청년의 우정과 갈등을 그린 이즈츠 가즈유키 감독의 영화
<우리 학교>(2006) 일본 오사카의 조선학교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을 담은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 동안의 나그네』 재일조선인 2세인 작가가 자신의 유년 시절 사할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식민지 조선인의 고통스러운 이산과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삶을 다루는 이회성 작가의 소설
『피와 뼈』 재일조선인의 삶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양석일 작가의 소설. 최양일 감독의 동명의 영화 <피와 뼈>도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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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진 중국근현대사 공부를 통해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와 사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신한대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에서 ‘유동하는 경계’를 키워드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다양한 경계를 들여다보고 있고, 한국외대 융합인재학부에서 학생들과 중국에 대해 수업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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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가 애플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에서는 소설 『파친코』와 함께 재일조선인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었습니다. 이 시기는 2021~2022년 무렵으로,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 배우님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디아스포라’라는 키워드가 더욱 주목받던 시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문화적 조명이 한때의 열풍으로만 스쳐 지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의 악씨레터를 읽으며, 재일조선인의 삶이 단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생생한 현실임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한 사람의 발걸음과 시선이 우리 모두에게 디아스포라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답사기는 더욱 반갑고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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