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중순, 중국인 친구들이 서울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 친구들과 처음 만나는 거라 한국을 소개해 줄 생각에 약간 들떠 있었습니다. 지하철 광화문역에서 만나 광화문광장 쪽으로 나가던 길에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주했습니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한 사람이 메가폰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너 중국인이지? 니네 나라로 돌아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계엄 선포 이후, 한국 사회 곳곳에서 ‘중국 혐오(혐중)’ 정서가 보다 노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선거에 중국인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거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여해 이를 조종하고 있으며, 심지어 헌법재판소 등 주요 국가 기관에까지 중국인들이 일하고 있다는 등의 주장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여러 보도를 통해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한국 선거 개입 의혹을 제기한 보도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주한미군사령부의 확인을 통해 오보로 드러났습니다.
‘명백한 거짓’을 믿고 선동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고 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주장을 여전히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러한 주장을 공적인 자리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정치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한 이해는 다소 간단합니다. 만약 혐중을 선동한 일부 정치인들이 자신의 주장을 사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는 논리적 사고와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반대로 거짓임을 알면서도 주장한 것이라면 공적 책임과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죠. 어느 쪽이든, 공인의 발언이 갖는 무게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오히려 첫 번째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왜 사람들은 사실과 어긋난 주장을 맹신할까요?(이는 상대적인 것임을 인정합니다. 역으로 제 생각이 전혀 사실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최근 한국 사회의 혐중 현상에 대해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타자화’의 맥락에서 접근해 보았습니다.
‘타자화’를 통해 본 혐중
타자화란 특정 대상을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간주하여, 그들의 고유한 주체성을 부정하고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생각과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선관위나 헌법재판소와 같은 한국의 주요 기관에 외국 세력이 조직적으로 침투한다는 이야기는 그 가능성 자체가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중국이, 아니 다른 그 어떤 나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한국에서 정치 공작을 전개할 수 있을까요. 한국이 그것을 모르거나 방치할 정도로 무력한 국가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편견은 그 어떠한 논리보다도 앞서며, 사실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사고는 이쪽 아니면 저쪽과 같이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되고, 정서적 반응이 논리적 판단을 앞지릅니다. 이는 타자화의 전형적인 작동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혐중 정서를 표출하는 시위 현장에는 때때로 충격적인 문구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문장은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의 표현이 담기기도 합니다. 시위 현장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선전물을 보았습니다. 그 논리에 따르면 중국인=빨갱이이므로 ‘중국인은 죽여도 돼’라는 걸 의미하는 걸까요. 섬찟합니다. 중국인도 나와 같은 감정과 희노애락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면 저런 말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출처: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혐중은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문제
혐중과 타자화는 중국의 문제가 아니고 한국 사회의 문제입니다. 혐중을 표현하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현상을 배태한 한국 사회 전체가 숙고해야 할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2010년대 이후 성소수자 혐오를 공개적이고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흐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를 성소수자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성소수자 혐오를 선동했던 세력이 이제는 중국인, 혹은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 세력은 사랑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하면서도 혐오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반중/반공주의 전사가 되어서 말이죠. 혐오는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혐오하는 주체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은 언제든 필요에 따라 선택될 수 있습니다. 혐오는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게 된 사회의 구조적 조건에 대한 문제입니다. 다음으로 혐오의 대상은 누가 될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혐중을 우리 사회 모두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혐오를 선동하고 또 이에 호응하는 우리 사회의 조건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혐중 #중국 #타자화 #계엄 #빨갱이는죽여도돼
박석진중국근현대사 공부를 통해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와 사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신한대 탈분단경계문화연구원에서 ‘유동하는 경계’를 키워드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다양한 경계를 들여다보고 있고, 한국외대 융합인재학부에서 학생들과 중국에 대해 수업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막 시작되던 2020년 1월, 저는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었습니다. 기차에 탔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저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옷으로 코와 입을 가렸습니다. 무척 불쾌했습니다. 그런데 기차에서 내린 후, 한 무리의 아시아인을 마주쳤고 저는 가족들을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이었고,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구보다 싫어하면서, 동시에 너무도 쉽게 혐오의 실천자가 될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 저를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혐오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문제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오늘의 악씨레터를 통해 그 물음 앞에 함께 서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