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씨 뉴스레터 Vol.1 No.8 2023.9.27. |
|
|
엄태화 감독은 제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사람입니다. 그동안 사는 게 바빠서 엄태화 감독을 안중에 두지 않았는데, 이번에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드디어 돌아왔더군요. 각본/감독으로 참여한 작품이 2016년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드디어’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컴백입니다. 정말이지 반갑습니다! |
|
|
‘엄태화’라는 유토피아
제가 엄태화 감독을 좋아하게 된 배경에는 장편 데뷔작 <잉투기>(2014)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 독립영화관에서 우연찮게 보게 된 영화인데, 청춘의 날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패기에 매료되었죠. 동시대 청년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진지하거나 겉멋을 부리기보다는 유쾌하면서도 꾸미지 않는 그 투박함이 상당히 인상 깊었어요. 차기작 <가려진 시간>(2016)에서는 판타지적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는데, 그 안에서 휴머니즘을 피워내는 유려함에 반하게 되었답니다.
엄태화 감독은 단 두 편의 영화만으로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미학을 구축하고 있죠. 단출한 필모그래피지만 어느 감독의 것보다 내실 있습니다. 덧붙여 엄태화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작지만 알찬 희망을 마주하게 됩니다. 팍팍한 현실이나 기이한 상황 속에서도 인물의 고군분투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 깊숙한 곳에서 희망이 맺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는 기분이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서 마시는 맥주 맛이랄까? 그래서 저에겐 엄태화 감독의 영화는 유토피아에요. 천편일률 속에서 고유한 빛을 내고, 비루한 현실에서 희망을 보게 하는 한 떨기 유토피아!
|
|
|
엄태화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지난 5일, ‘에무시네마’에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관람했습니다. 감독 GV가 있다는 소식에 영화 보는 것을 아껴두었다가 한걸음에 달려갔죠. 고백건대 영화보다는 엄태화 감독의 실물 영접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감독을 만나기 전 작은 스크린을 통해 먼저 영접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꽤 흥미로운 세계관을 전시하고 있더군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 유일하게 건재한 오래된 아파트,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살아남은 인간들의 피 튀기는 생존 분투. |
|
|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 흔한 아포칼립스 장르와 유사하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는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어요. 바로 아파트를 디스토피아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욕망이 투영된 대상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형 디스토피아를 설계하는 데에 아파트만큼 절묘한 공간은 또 없을 겁니다.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곳엔 언제든 디스토피아가 깃들기 마련이니까요. 아파트를 배경으로 판타지 이야기를 접목한 것은 아주 현명한 연출입니다.
영화는 독특한 세계관에서 시작해 블랙코미디와 스릴러를 오가며 점차 비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인간 군상의 추악함을 신랄하게 드러냅니다. 흡입력 있는 플롯, 정교한 미장센, 조화로운 연기 앙상블까지, 영화가 갖춰야 할 것을 다 갖춘 이 영화가 왠지 저는 끌리지가 않았어요. 왜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답을 찾았어요. 이 영화는 내가 그리워하던 유토피아가 아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영화적 재미와 짜임새가 완벽한 영화임에 틀림없어요. 허나 이를 뒤집어보면 지극히 전형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정밀하게 계산된 플롯은 정확한 타이밍에 갈등과 반전을 보여주고, 적재적소에 배치된 심오한 미장센은 해석의 쾌감을 주며, 결말 장면은 작심한 듯 메시지를 풀어헤칩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끄럽게 잘 빠진 영화는 누가 보더라도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엄태화 감독만의 그 날것의 패기를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의 엄태화 감독의 작품과는 결이 다릅니다. 이전 작품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정서는 그냥 절망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박보영의 캐릭터로 말미암아 희망을 보여주려고 애는 쓰는데, 글쎄요 그 장면에서 희망을 목도할 관객이 몇이나 될까요? 영화 내내 현실감 없이 ‘이상’만을 대변하던 캐릭터가 우연하게 긍정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결말이 과연 희망일까요? 그건 ‘허무맹랑(虛無孟浪)’ 이랍니다.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이상은 희망이 아니라 또 다른 절망이니까요. |
|
|
그럼에도 ‘엄태화의 유토피아’를 동경하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에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엄태화라는 나의 유토피아가 콘크리트에 갇혔구나. 감독만의 독특함이 사라진 자리에 상업영화의 코드가 세워진 것을 보니, 어쩐지 갑갑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극장에 오기 전 영화의 관객수가 300만이 넘었다는 뉴스에 기뻐하던 제 모습이 겹쳐보여서 웃음이 새어나왔어요. 나의 유토피아가 널리 알려진 것에 기뻐해야할지, 내가 숨 쉴 유토피아가 콘크리트에 가려진 것에 슬퍼해야할지, 인생은 참 알 수 없어 재밌는 것 같아요. |
|
|
GV가 시작되고 드디어 엄태화 감독을 마주했습니다.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와 창작 작업을 향한 소회를 들으면서 엄태화 감독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겸손하고, 솔직하고, 품위 있고, 특히 영화와 함께 작업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진중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딱 그만큼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 순간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찾지 못했던 희망을 보았습니다. 저는 좋은 사람이 좋은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어요. 엄태화 감독의 창작관과 휴머니즘이라면 언제든 다시 엄태화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
|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손익분기점 도달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뉴스가 새로 나왔네요. 이번 영화가 반드시 손익분기점을 돌파하기를 간절히 기도할게요. 그래야 차기작에선 어떤 재난에도 타협 없이 건재한 엄태화의 유토피아를 구축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오늘의 디스토피아를 견뎌봅니다. |
|
|
이태리
한신대학교 디지털영상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한국영화, 장르영화, 스토리텔링, 공연예술, 연기예술, 문화콘텐츠 이론, 정체성 등을 공부하고 있어요. 삶의 미(美)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콘텐츠도, 학문도, 인간 사회도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전형적인 것과 틀에 박힌 사고를 싫어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대상과 관계 맺고 싶어 해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적대하며, 이 세상에 참신하고, 유니크하고, 이상한 것들이 넘쳐날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총무이사,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고, 단편영화 <에스프레소 더블샷> <분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를 각본/연출로 찍었습니다. 언젠가 장편영화로 입봉하여 많은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꿈이에요. 획일화돼 가는 세상에서 나다움을 바로 알고, 나만의 이야기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어요. |
|
|
오늘의 악씨레터는 여기까지
🎥
저에게 엄태화 감독은 매우 새롭습니다. 최근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만 들어보았기 때문이죠. 악씨레터를 읽고 나니 엄태화 감독의 필모깨기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긴 연휴 동안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부터 <가려진 시간> <잉투기>까지 모두 섭렵해볼까 합니다. 그의 영화에서 저는, 여러분은 어떤 유토피아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
|
|
내일이면 추석 연휴가 시작됩니다!! 🌰🌝🧡
모처럼 긴- 연휴, 많은 계획 있으시죠?
무엇보다 가족, 친구, 지인...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연휴의 시작과 끝은 악씨레터와 함께~!! 다음주 수요일에 다시 만나요! |
|
|
사단법인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asiacci@naver.com서울시 종로구 난계로 259, 602호(숭인동, 경일오피스텔)수신거부 Unsubscribe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