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씨 뉴스레터 Vol.1 No.7 2023.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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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망루피 아시나요?
루피는 <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한 핑크색 비버예요. 뽀로로 친구 루피는 착하고 소심한 공주풍 캐릭터로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흑화’ 버전인 잔망루피는 피곤, 짜증, 시무룩, 지루함 등 다양한 현실적인 표정으로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잔망(孱妄)은 ‘얄밉도록 맹랑함’을 뜻한다고 해요. 실제로 SNS 등에 등장하는 잔망루피는 ‘어쩌라고’ ‘다시는 보지 말자’ ‘몰라 배째’ 등을 당당하게 외치며, 어린 루피와는 달리 ‘할 말 하는’ 속 시원한 ‘어른 루피’로 성장한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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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와 잔망루피 / 사진 출처: 루피(뽀롱뽀롱 뽀로로) 나무위키(namu.wi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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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누리꾼이 재미로 만든 밈이 이제는 카카오 이모티콘,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가상세계뿐 아니라 다양한 굿즈로도 만날 수 있게 됐어요. 팬시용품, 화장품, 건강식품, 패스트푸드, 가전제품 등에 이어, 세계적인 명품 쥬얼리, 자동차 브랜드와도 협업하고 있고, 심지어 중국에까지 진출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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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점령한 핑크 비버
요즘 들어 중국 SNS에서 잔망루피를 정말 자주 보게 돼요. 짤은 물론이고 ‘루피 인형을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루피 한국 구매대행 구함’ 등의 게시글도 많이 봤어요. 처음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활약하던 루피는, 올해 6월 1일 상하이의 식음료 브랜드인 러러차(樂樂茶)와의 공식 협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했어요. 러러차는 ‘회사원 잔망루피’ 콘텐츠와 함께 이벤트 음료, 한정 굿즈를 출시했는데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렸어요. 이후 체인 잡화점 미니소(名創優品)에서도 루피 인형을 내놓았는데, 온라인 발매 당일 시작과 동시에 품절됐다고 해요. 중국 소비자의 루피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느껴지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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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러차’에서 출시한 어린이날 이벤트 음료, 굿즈, 영상 콘텐츠 / 사진 출처: 러러차 웨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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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청년들은 잔망루피에 열광할까?
한국에서 잔망루피의 주요 팬층은 소위 말하는 MZ세대예요. 어릴 때 뽀로로를 보고 자란 이들이 구매력을 갖추면서 자연스럽게 핵심 타깃으로 떠오른 거죠. 이들이 잔망루피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략 다음 몇 가지로 분석되고 있어요. 첫째는 물론 루피 캐릭터가 귀여워서이고, 둘째는 포켓몬빵이나 <슬램덩크>처럼 과거에 대한 소비자의 추억을 활용하는 노스탤지어 마케팅 효과예요. 셋째는 순수하고 소심하던 루피가 갑자기 거침없는 말과 행동을 보인 데서 오는 반전매력이고, 넷째는 어린 시절을 공유한 친구가 ‘나’와 함께 성장해서 비슷한 일상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동질감도 한몫했을 거예요.
그런데 중국인은 어떤가요? 중국 청년들은 어린 시절에 뽀로로를 보지 않았어요. 심지어 루피가 뽀로로 친구인 것도 몰라요. 노스탤지어 마케팅이 통하지 않음에도 왜 중국에서 잔망루피가 인기 있는 걸까요?
잔망루피 콘텐츠는 대부분 일상을 다뤄요. 루피가 야근하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알바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죠. 일상적으로 자주 느끼지만 사회적 규범 등 현실적인 이유로 쉽게 표현하지 못하고, 들여다보지 못한 우리의 감정을 루피가 대신 느끼고 표현하는 거예요. 이런 잔망루피를 보며 청년들은 쾌감과 대리만족을 느끼지 않을까요? 불편한 감정을 귀여운 이미지와 재치있는 말로 표현한 잔망루피를 보면서 위로 받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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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망루피, 일상의 진통제
콘텐츠로서의 잔망루피는 청년의 감정을 대신 표현함으로써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위로가 필요할까요?
우리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과열 경쟁 속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어요. 게다가 우리 사회는 ‘긍정적인 인간형’을 선호하기에, 무기력감, 거부감, 불만, 분노 등을 쉽게 드러내지 못해요. 괜히 인간관계나 직장생활이 힘들어질까 봐 부정적인 감정은 어떻게든 억누르죠. 한국계 독일 철학자 한병철이 저서 『피로사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이 우리 모두를 피로하게 만드는 거예요.
잔망루피는 일상의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진통제예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역설적이에요. 우리를 지치게 한 것은 자본인데, 우리를 위로해 주는 잔망루피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누가 카카오 이모티콘과 굿즈를 제작하고 영상을 올리며 SNS를 운영하나요? 자본 때문에 지친 청년들은 루피의 위로를 원하고, 루피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하죠. 그리고 그 돈은 다시 청년을 지치게 하는 자본가에게 들어가, 더욱 강력한 힘으로 청년을 지치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100년 전 미국의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와 뭐가 다를까요? 노동을 통해 받은 잉여가치를 뺀 임금으로, 포드 자동차를 산 노동자들 말이에요.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포드 자동차를 샀지만, 우리는 잔망루피 짤과 인형으로 위로받아야 하는 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잔망루피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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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구리
사단법인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특임연구원. ‘조선어’를 배워서 한국을 만났고, 대학원 공부로 삐딱함을 얻었습니다. 제일 자주 하는 생각은 “왜?”이고, 제일 싫어하는 대답은 “원래 그래~”입니다. ‘원래 그런 것’을 인정하라는 말보다 더 폭력적인 말이 있을까요? ‘원래’를 거부하는 게 공부하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회의감이 들 때마다, 어느 겨울날 지하철 2호선에서, 존경하는 분과의 대화를 떠올리곤 합니다. “논문을 열심히 잘 써도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 왜 하는 걸까요?”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워지지 않겠어요?” 공부가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지금은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이 조금씩 그려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허물고, 자아와 타자의 간격을 좁히고,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향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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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악씨레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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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야 잔망루피의 인기비결을 알게 되었어요. 위로가 필요한,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잔망루피는 한 알의 진통제💊로 작용했던 거네요. 사실 저는 ‘할 말 하는’ 잔망루피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 같아요. 실제로는 그럴 수 없더라도 루피를 통해 ‘몰라 배째!!’를 외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맴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잔망루피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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