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동네 산책을 하다가 목련꽃 봉오리가 부푼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봄이 코앞에 왔다는 생각에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지난 겨울의 충격과 상실로 아직 봄을 맞이하기엔 무겁고 어두운 마음 탓인가 봅니다. 계절의 순환처럼 우리의 삶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쓸쓸한 겨울의 끝에서 한자락 모닥불처럼 온기를 느꼈던 전시회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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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백기완 4주기 전시, <신학철, 백기완을 부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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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찾은 건 2월의 어느 오후였습니다. 전시공간은 ‘백기완마당집’이었는데요. 2021년 백기완선생님께서 별세하시고, 생전에 운영했던 통일문제연구소를 가족과 지인, 시민들이 뜻을 모아 새로운 공간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서울대병원 뒤편 골목에 자리한 백기완마당집은 대학로의 소란한 시간들과 대조되는 조용한 골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2월 5일부터 8월 15일까지 백기완 4주기 추모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이번 전시는 백기완노나메기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신학철 화백의 그림으로 백선생님의 생애와 한국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만나는 기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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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집에 걸린 전시 포스터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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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집 1층에는 선생님이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옛살라미(옛방)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평소 사용한 책상과 돋보기, 아끼던 책들, 1974년 긴급조치로 인한 군사재판 때 입었던 수의, 1987년 故이한열 장례 때 입었던 하얀 무명바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책상 뒤로는 신학철화백의 작품 <엿장수>가 걸려 있습니다. 빨간 모자를 쓴 채 입을 쫙 벌린 엿장수가 가위 소리에 맞춰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그림을 보고 백선생님은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하던 중 프레스에 찍혀 손이 잘리고, 그 일도 못하니까 시장바닥에서 엿장수가 되어가는 모습’을 스토리로 만들어주셨다고 해요. 병상에 눕기 전까지 이 그림을 배경으로 책상에 앉아 독서를 하거나 집필작업을 했던 백선생님은 연구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몸은 망가졌어도 꿈으로 아우성치는 노랑 목젖이 이 그림의 생명력”이라는 설명을 즐겨 하셨다고 합니다. 불쌈꾼, 백발투사로 알려져 있는 백기완 선생님은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고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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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못 팔아, 억만금을 줘도 안 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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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님과 신이사장의 인연은 그의 작품 <모내기>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직후부터였습니다. 이후 백선생님의 <부심이의 엄마생각> 표지, 신문연재 <하얀 종이배>의 삽화 등을 그리면서 오랜 우정을 나누는 동무이자 동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학철 이사장은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서정적이면서도 삶의 애환이 담긴 그의 그림 속엔 우리 민족의 고유한 감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시장에는 더 많은 그림들이 마음을 촉촉하게 해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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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신학철, <땅에 떨어진 것은 먹는 것이 아니다, 뱉어> (우) 신학철, <진달래와 나비>
/ 그림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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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16년 만에 공개된 <어머니>는 백선생님이 가장 아꼈던 그림인데요. ‘노나메기 문화관’ 건립을 위해 신이사장이 기부한 그림을 판매할 때에도 “억만금을 줘도 안 팔아”라고 지켰던 일화가 유명합니다. 백선생님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국수를 먹는 여인의 모습을 보며 배고픈 시절 자식을 낳아 기른 어머니의 정서가 잘 담겨 있다고 칭찬하셨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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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 <어머니> / 그림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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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철 화백의 그림에 등장하는 백기완 선생님은 역사의 변곡점에서 언제나 맨 앞에서 끝까지 민중과 함께했던 에너지가 생동감 있게 담겨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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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신학철, <새뚝이> (우) 신학철, <부활도-산 자여 따르라>
/ 그림 출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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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편지를 통해 전할 수 없는 좋은 작품들과 근현대사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는 역사의 기록물들이 마당집 1층과 2층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평생 가난한 노동자의 벗으로 고통의 현장에 함께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백기완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이 궁금하시다면 백기완노나메기재단 홈페이지를 방문하시거나 광복절까지 이어지는 전시를 관람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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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백기완 선생님이 꿈꾸던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뜻하는데요. 경제적 불평등과 계급의 양극화, 차별과 부조리의 일상화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노나메기가 더욱 절실한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서야 한다”고 일갈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보다 평등하고 살맛 나는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던 중 재단 홈페이지에서 <하얀 횃불, 백기완>이라는 짧은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요. 선생님의 생생한 불호령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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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안 보일 때 가랑잎이라도 모아서 불을 지펴가지고 앞을 밝혀주는 것을 문화라 그러는 겁니다.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를 모아서 불을 질러가지고 추워 떠는 우리들의 몸을 따시게 해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앞을 밝혀주는 것 요걸 가지고서 문화라 그런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쓰레기를 모아가지고 불을 당겨서 보이지 않는 앞을 당기고 있어요? 하고 있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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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봄에는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선명하고, 따뜻해지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마칩니다. 모두 건강한 봄날 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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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노나메기재단 #신학철 #전시 #대학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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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
문화콘텐츠 비평가.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이사.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팟캐스트 ‘차이나는 무비’ 진행.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교양/다큐 400여 편을 집필했어요. 현재 KBS 시청자평가원, OBS <미디어공감 좋은TV> 고정패널로 활동 중이고,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TV가이드 등에 콘텐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어요. 문화콘텐츠를 통한 사회적 실천에 관심이 많아서 방송, 영화, 게임, VR, XR 등을 통한 콘텐츠 액티비즘 연구를 수행 중이에요. 저서로는 『뉴미디어와 스토리두잉』, 『디지털 소양을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공저), 『미디어 격차』(공저), 『AI와 더불어 살기』(공저), 『문화콘텐츠와 트랜스미디어』(공저)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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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씨의 반가운 소식 전해드려요!
올해 악씨는 종로의 새로운 공간에서 ACCI 아카데미를 오픈합니다.🎉 ACCI 아카데미 종로는 1, 3, 5호선이 모이는 종로3가역에서 걸어서 2-3분 거리로, 수업 들으러 오시기에 아주 적당한 위치랍니다.
ACCI 아카데미 그 첫 번째 수업은 ‘이감독과 함께하는 실전연기’입니다. 다수의 연극과 뮤지컬에서 배우로 활약하시고 단편영화 감독까지 섭렵하신 이감독님과 함께 7주에 걸쳐 즐겁게 연기를 배워보고 싶으신 분은 바로 이 링크(클릭)를 통해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3월 21일(금)에 시작하고, 신청은 3/16(일)에 마감입니다. 시간, 장소, 수강료 등 자세한 사항은 아래 포스터를 참고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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