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 열풍은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문화콘텐츠 중에서 게임계는 PC주의가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그만큼 PC주의에 대한 반발이 큰 곳입니다. 게임계에서 PC주의는 주로 게임 속 캐릭터를 다인종이나 성소수자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죠. 이러한 이유는 게임 장르에 따라 스토리텔링이 중요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캐릭터 설정으로 PC주의 핵심 가치인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를 표방하는 것이죠. 문제는 게이머들만큼 ‘캐릭터성’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분재(盆栽) 게임’이라고 불리는, 캐릭터를 분재처럼 모으고 가꾸며 플레이하는 게임도 존재합니다. 이는 게임의 특징이 직접 캐릭터를 플레이하기 때문도 있지만, 게임과 게이머가 컬트(cult)와 서브컬처에 많은 영향을 받은 콘텐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주로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의 캐릭터가 사랑을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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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마법사에 대한 로망은 회색의 간달프에 대한 로망이라 할 수 있다. /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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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컬처에서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만큼 매력적입니다. 이는 서브컬처를 향유하는 문화가 이미 정형화되어 있는 ‘속성’ 자체를 향유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언제나 인기 많은 ‘전통적인 마법사’ 캐릭터는 로브, 지팡이, 고깔모자 등의 이미지가 함께 연상되고, 하늘에서 벼락과 메테오를 떨어뜨리길 원합니다. 개인에 따라 노인의 이미지나 여성의 이미지를 원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의’ 캐릭터를 조형하기보다, 게임 이용자들이 공유하는 심상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양 갈래 머리에 금발, 키 작은 부잣집 소녀에게는 츤데레한 성격이 따라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최근 이슈가 되었던 ‘너드남’이란 키워드와 함께 뿔테안경, 더벅머리, 체크 남방, 큰 키, 자기가 잘생긴 줄 모름 등의 요소들이 함께 따라붙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캐릭터와 함께 조형되는 매력 요소를 ‘모에(萌え)’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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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란 여성 캐릭터에게 향하는 애정 표현으로 일종의 감탄사와 유사한 것입니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열광, 혹은 화자가 열광하는 대상의 기호화된 매력을 가리키는 일종의 문화적 코드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하고 색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이미 상상해 둔 ‘그’ 캐릭터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서브컬처에서는 개개의 문화콘텐츠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설정’이나 세계관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즈마 히로키는 작가가 독자에게 ‘모에의 리터러시(literacy)’를 기대하고 캐릭터를 조형할 수 있고, 독자는 그 조형된 모에의 속성을 소비한다고 말합니다. 즉 서브컬처에서 작가와 독자는 작품 안에서 몸집이 작고 덤벙대는 여자아이가 나타나면 반자동적으로 그녀가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할 것이고, 저 상황이라면 저렇게 할 것이라고 여러 개의 장면을 그려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키가 작고, 양 갈래 머리를 한 소녀가 나오면 츤데레(ツンデレ)*의 성격을 가진 캐릭터라고 이해한다든가, 안경을 쓴 반장 캐릭터가 나오면 성격이 엄격하고 착실한 캐릭터라는 일종의 코드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모에화를 통한 캐릭터 조형의 특징이 모든 게임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브컬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게임을 ‘서브컬처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러나 모에화의 방식은 다르더라도 게이머들은 다른 콘텐츠 향유자보다 캐릭터가 자신의 ‘로망’을 실현시켜 주길 강하게 바랍니다. 게임에서 게이머들은 그 캐릭터를 직접 조작함으로써 그 캐릭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비평가에게 극찬을 받았지만 게이머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이유도 이러한 특징 때문입니다. 한 게이머는 자신이 사랑하던 1편의 주인공을 죽인 캐릭터를 6시간 동안 플레이해야 했던 시간을 ‘고통’스러웠다고 표현하기도 했죠.
이런 점에서 오늘날 게임계의 PC주의에 대한 게이머의 반발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게임들이 PC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게이머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부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죠. 만약 ‘너희들이 가진 스테레오 타입은 잘못된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이러한 방식은 효과적일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따른 게이머들의 반발심은 차치하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게이머들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버무려진 로망을 깨부수는 것만이 게임의 목적일까요? 사람들의 선입관을 부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디 게임이나 예술 게임도 아닌 거대 자본이 들어간 AAA 게임**의 목적이 ‘고정관념 타파’에 맞춰져 있다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죠. 앞서 모에가 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속성들의 문화적 코드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캐릭터들이 가지는 스테레오 타입은 매력적인 요소를 지시합니다. 그러한 요소들에서 고개를 돌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력적이지 않은 요소들로 캐릭터를 조형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게이머들의 ‘기대’를 배반하면서까지 말이죠. 그러한 게임이 성공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게이머들의 로망에 배반하지 않고, PC주의의 가치인 DEI를 표방할 수는 없을까요? 놀랍게도 게임계는 현재 그 어떤 문화콘텐츠보다 PC주의에 대한 반발이 심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 어떤 문화콘텐츠보다 열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게임이 재밌기만 하다면 말이죠. 염소를 조작해 도시의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게임 <염소 시뮬레이션>이 완성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염소’라는 키워드만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곳이기도 하니까요.
서브컬처의 모에적 요소와 스트레오 타입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캐릭터들이 DEI를 표방하는 게임으로 <길티기어> 시리즈가 있습니다. <길티기어> 시리즈는 격투 게임 장르의 하나로 기존의 격투 게임 공식과 달리 서브컬처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격투’보다는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에요. 따라서 간합을 중시하는 일반 격투 게임과는 달리,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는 다양한 컷신(cut scene)과 ‘기술 한 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일격필살, 살계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각 캐릭터만의 독특한 즉사기 연출을 통해 이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어요.
<길티기어>에서 캐릭터는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모든 캐릭터는 고유의 전용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며, ‘초필살기’라 불리는 특수기는 각각 독특한 풀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게임 속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스토리와 설정, 매력적인 일러스트를 갖추고 있죠. 이는 <길티기어>가 격투 게임이면서도 서브컬처 게임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기 때문입니다. <길티기어>의 캐릭터들은 서브컬처의 문화적 코드를 활용해 조형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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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한 논바이너리 캐릭터 테스타먼트 /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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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기어>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외형적으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LGBTQ+와 같은 설정도 캐릭터의 개성을 배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길티기어>의 많은 캐릭터가 성소수자이거나 장애를 지녔거나, 유색인종으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위 그림의 테스타먼트는 논바이너리입니다. 남성적인 캐릭터에서 여성적인 외형으로 변하는 테스타먼트는 캐릭터 소개에서도 그/그녀(He/She) 대신 ‘They/Them’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또 다른 캐릭터인 브리짓은 시리즈 초기에는 여장 남성 캐릭터였다가 <길티기어 스트라이브>에서는 트랜스젠더로 발전했습니다. 골드루이스 디킨스는 미국 남부 백인을 상징하는 뚱뚱하고 늙은 노인이지만, 국방부 장관이자 외계인을 관에 넣고 다니는 독특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외에도 장애인, 히스패닉, 흑인 사무라이, 게이, 스토커 등의 다양한 요소가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는 데 활용됩니다. <길티기어> 팬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력적인 설정으로 열광합니다. 즉 게이머에게 PC주의적 요소는 ‘멋’있다면 전혀 문제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최근 PC주의를 표방하는 게임들의 캐릭터가 게이머에게 ‘멋’이 없기 때문에 반발을 사는 것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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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개 쩌는 것’ + ‘개 쩌는 것’ + ‘개 쩌는 것’ = 개 쩌는 것이라는 밈에서 나온 ‘메카 프린세스 사우르스’ /
출처: [짤툰 오리지널] 메카 프린세스 사우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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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들에게 ‘멋’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복합적이지만, 게이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코드가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캐릭터의 매력은 반드시 미형이거나, 혹은 못생겼더라도 특별한 개성이 있어야만 할까요? 단순히 평범하거나 ‘못생긴’ 캐릭터는 왜 안 될까요? 게이머들이 LGBTQ+ 정체성을 캐릭터의 개성으로 수용할 수 있다면, 평범하거나 못생긴 외모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특히 중요한데, PC주의 게임들이 의도적으로 캐릭터를 평범하게 혹은 못생기게 묘사함으로써 미형 캐릭터와 외모지상주의에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게임 속 ‘못생긴’ 캐릭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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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츤데레(ツンデレ)는 ‘츤츤데레데레’(ツンツンデレデレ)의 약자입니다. 여기서 츤(ツン)은 여자가 남자에게 삐치거나 화가 났을 때 툴툴거리는 태도를 의미하며, 한국어의 ‘흥’ 혹은 ‘칫’과 유사합니다. 반면 데레(デレ)는 ‘照れる(데레루)’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표현으로, 얼굴을 붉히거나 부끄러워하며 상대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즉, 연인 사이가 되기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쌀쌀맞게(ツン) 대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부끄러움을(デレ) 타거나, 겉으로는 쌀쌀맞아 보여도(ツン) 속으로는 부끄러움을 타는(デレ)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AAA 게임(Triple-A 게임)은 대규모 자본과 인력, 대형 배급사의 지원을 받아 개발, 마케팅 되는 고예산 게임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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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문화콘텐츠학 박사로, 한국외대, 한성대, 용인예술과학대에서 플랫폼, 웹콘텐츠, 웹소설, 영상비평, 윤리학, 글쓰기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화콘텐츠를 사랑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경향성과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주요 연구 테마는 플랫폼, 웹소설, 대중성, 세대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AI, 플랫폼, 키치를 주제로, 문화콘텐츠 생산과 향유 문화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대중들의 삶과 일상에 관심을 가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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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악씨레터에서 언급된 것처럼, 게임계는 PC주의가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면서도 동시에 큰 반발이 일어나는 문화콘텐츠 분야입니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며 다시 한 번 DEI 정책을 폐기하라는 행정 명령 소식이 전해졌고, 이에 관해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DEI를 둘러싼 여러 측면을 함께 살펴볼 적절한 시점인 듯합니다. 앞으로 게임계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도 궁금해집니다. 다음 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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