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기존의 소설과 뮤지컬로 만났던 안중근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어쩌면 누군가에겐 역사적 고증과 영웅적 스토리가 생략되어 아쉬운 여운을 남겼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예상을 빗나간 우민호식 독립군 이야기가 지닌 독특한 장르성이 지금의 저와 우리 사회를 둘러싼 역사적 공간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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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의 첫 장면은 얼어붙은 대동강을 걸어가는 안중근을 보여줍니다. 시간적으로는 대한의군이 신아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인데요. 안중근 참모중장은 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만국공법에 따라 생포된 포로들을 풀어주지만 결국 일본군의 보복성 공격으로 부대원 대부분을 잃게 됩니다. 맹렬한 추위에 지쳐 차디찬 얼음 바닥에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 연해주로 향하는 안중근의 절치부심(切齒腐心)은 먼저 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들의 목숨을 대신했다는 죄책감에서 기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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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여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날, 그 시간으로 향합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혼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매 순간 누군가의 목숨과 맞바꾸며 힘겹게 도착한 하얼빈역. 영화는 안중근의 총성을 하늘 위에서 들려줍니다. 먼저 간 동지들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의미로 연출된 부감샷은 압도적 높이와 깊이를 보여줍니다. 성공한 상업영화 감독으로 역사의 결정적 순간을 스펙타클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감독은 다른 선택을 한 것이죠. 영화 제목이 ‘안중근’이 아니라 ‘하얼빈’인 이유도 이 장면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실한 고증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접근과 상상이 시간의 과녁을 향해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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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은 2024년 12월 24일에 개봉했습니다. 12·3 사태의 충격과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때였죠. 2023년 11월 22일 개봉한 <서울의 봄>이 눈앞의 현실이 된 기막힌 순간을 보면서 새삼 “예술이란 무엇일까?”를 떠올렸다면 너무 고답적일까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영화라는 텍스트,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행위여야 할까요?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펼쳐 든 책이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입니다. ‘어두운 시대’란 전쟁의 광풍으로 죽음과 폭력이 난무했던 1, 2차 세계대전 전후를 뜻합니다. <하얼빈>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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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전기(傳記) 형태로 그 시대를 살았던 시인, 작가, 철학자, 성직자 등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절친이었던 발터 벤야민입니다. 벤야민은 미디어와 콘텐츠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아우라의 붕괴’와 ‘도시 산책자’로 알려져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관심은 언어와 역사, 문학과 예술, 철학과 정치 등 다방면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통찰력을 ‘시적 사유’라고 표현합니다. 현재를 통해 과거를 조망하고,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진리를 캐기 위해 진주 조개를 채취하는 잠수부처럼 고전과 역사, 문학과 예술에서 사유의 단편들을 열심히 수집했기 때문입니다. 아렌트는 벤야민의 시적 사유가 단순히 “과거를 있는 그대로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시대의 재생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벤야민에 대한 아렌트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발터 벤야민』(이성민 옮김, 2020 필로소픽)으로 입문하신 후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을 일독하시길 권유드립니다. 벤야민과 아렌트 모두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어둠을 밝히는 작업을 수행했는데요. 두 사람이 남겨둔 사유의 단편 속에서 <하얼빈>의 독립군들을 떠올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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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우리는 언젠가 유혈과 공포가 사라진 문명을 갖게 될 날을 이 지구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우리의 지구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싶다.”
-발터 벤야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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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장 어두운 시대에서도 밝은 빛을 기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밝은 빛은 이론이나 개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하면서 깜빡이는 약한 불빛에서 나올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 저작을 통해 거의 모든 상황에서도 밝은 빛을 밝히고, 지구상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수명을 넘어 밝은 빛을 제시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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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기록물에서 창조적 해석으로 발전하면서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수행해 왔다면, <하얼빈> 역시 고정된 역사의 시선을 비틀어 또 다른 관점에서 그날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사의 순간 울려 퍼지는 ‘꼬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는 서러움과 슬픔이 깊이 배인 울음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벤야민은 영화라는 미디어가 갖는 힘을 촉각적 재현에서 찾습니다. 소리와 움직임, 그 속에 담긴 표정과 행위, 그리고 관계들. 영화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유동하면서 시간을 비틀고 은폐된 진실을 전복시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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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호 감독은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엄두를 못 냈을 때 아내의 권유로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으면서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과거의 빛이 현재를 비추는 일. 문득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연설 중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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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두운 밤에는 우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묻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과 생명체의 1인칭 관점으로 상상하는 것을 고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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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영화도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불빛이라고 생각됩니다. 벤야민이 말했던 “이미 가라앉은 돛대 꼭대기에 있거나 생전에는 죽었지만 폐허 가운데 진정한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인 혹은 까마득한 다음 세대들에게 전하는 편지를 쓰는 행위. 덕분에 온 나라가 과거의 공포를 떠올린 채 웅크린 12월의 그날을 위로하듯 저 멀리 스웨덴에서 차분하게 들려온 한강의 언어는 저에게 또 다른 <하얼빈>을 상상케 하는 신호가 되어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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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호 #하얼빈 #한나아렌트 #발터벤야민 #한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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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아
문화콘텐츠 비평가.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이사.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팟캐스트 ‘차이나는 무비’ 진행.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교양/다큐 400여 편을 집필했어요. 현재 KBS 시청자평가원, OBS <미디어공감 좋은TV> 고정패널로 활동 중이고,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TV가이드 등에 콘텐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어요. 문화콘텐츠를 통한 사회적 실천에 관심이 많아서 방송, 영화, 게임, VR, XR 등을 통한 콘텐츠 액티비즘 연구를 수행 중이에요. 저서로는 『뉴미디어와 스토리두잉』, 『디지털 소양을 위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공저), 『미디어 격차』(공저), 『AI와 더불어 살기』(공저), 『문화콘텐츠와 트랜스미디어』(공저)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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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주 보고 있는 인스타가 있어요. 유기되거나 방치되거나 다친, 여러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조해서 임시보호 했다가, 입양 보내는 일상을 유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인스타그래머(@udadahae)예요. 누군가가 학대하고, 버렸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어두워졌다가도 아팠던 냥이가 회복해서 새로운 주인을 찾아 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요, 악한 존재일까요? 이런 물음이 목까지 가득 차는 날에는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가 “우리는 가장 어두운 시대에서도 밝은 빛을 기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니까요.
어두움을 물리칠 작은 불빛들을 상상하며, 저번에 이어 오늘도 장바구니(애도 일기, 슬픔의 위안 샀거든요!😎)에 책을 담아봅니다. <하얼빈>도 꼭 보려구요!!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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