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듯이 서예는 한자문화권의 고유한 예술로 오랫동안 전통과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요. 서예하면 흔히 중국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서예 종주국인 중국에 못지않게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서예가들을 배출해 왔어요. 최근에 대만에서 우리나라 서예사에 큰 족적을 남긴 대가(大家)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려 큰 호응을 얻었답니다.
국경을 넘은 콜라보레이션
대만의 국경절인 쌍십절(雙十節)을 앞두고 연휴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던 찰나에, 지인으로부터 한국 근현대 서예전이 지금 대만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설레이는 마음으로 오전 일찍 헝산서법예술관(橫山書法藝術館)으로 향했답니다. 타오위안(桃園)에 위치한 헝산서법예술관은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어요. 서법예술관이라는 용도에 걸맞게 벼루 모양을 형상화하여 설계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인문학적’ 감성이 깃든 건축물이라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헝산서법예술관은 대만에서 한국서예를 처음으로 알린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이번에 열린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The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Calligraphy)은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대만 타오위안미술관(TMoFA)의 협업으로 성사되었는데요.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2020년 코로나19로 사상 최초 온라인으로 개막했던 이 전시를 대만 미술관 관계자들이 접한 후 즉시 전시 초청을 제안했다고 하네요. 지난 4년 간의 노력 끝에 이번 전시가 성사되었다고 하니, 한국인으로서 내심 뿌듯했습니다.
이번 서예전은 “글은 곧 그 사람이다: 한국 근현대 1세대 서예가(書如其人:韓國近現代第一代書法家)”, “서예를 다시 말하다: 현대 서예의 실험과 돌파(再談書藝:現代書法的實驗與突破)”, “글씨를 그리고 그림을 쓰다(以書繪畫,以畫寫書)”, “디자인, 일상을 품다(融入設計,擁抱日常)” 총 네 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어요. 해방 후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한국 1세대 근현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전각, 회화,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서예를 잘 모르는 일반 관람객들이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 세션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는지라 한국서예의 궤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어요. 게다가 운 좋게도 전시설명 타이밍이 맞아서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설명을 듣고 나니 작품들이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각 세션별로 한국 현대 서예사의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꼽으라면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주역 64괘 차서도(次序圖)>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파리의 동양인으로 불리는 이응노 화백의 이 작품은 동양을 대표하는 경전 『주역(周易)』 64괘를 사람 형상으로 표현했어요. 관련 기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이응노 화백이 1967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파리로 돌아가 창작활동의 전기를 마련하며 1974년에 제작한 연작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유학자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던 이 화백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변화의 원리로 파악하는 주역의 세계관에 익숙했다고 하는데요. 이 작품은 내용적으로는 변화의 원리 속에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주역의 원리를 표현하되, 형식적으로는 서예와 같은 방식을 취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문자 추상의 연장선상에서 괘 하나하나의 의미를 형상화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처음에 봤을 때 너무 추상적이었는지라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다행히 큐레이터 선생님의 상세한 설명으로 작품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어요. 동양의 서예와 서양의 추상예술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그 안에 이 화백만의 철학적 사유를 응축한 걸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응노 화백의 <주역 64괘 차서도> ⓒ한지연 2024.4.12.
한국서예를 통해 ‘예술’을 생각해 보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예술의 무한한 확장성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서예 고유의 아름다움과 정교함에 현대 예술의 실험성이 어우러져 한국서예의 다양성을 향한 작가들의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경을 넘은 문화적 협업, 전통 서예와 현대 미술의 조우를 통해 예술의 힘과 가치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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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연중앙대학교 아시아문화학부 부교수. 현재 국립타이완대학교 중문과에 방문학자로 타이베이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중국현대문학을 비롯하여 중국의 현대 학술사와 문화, 근현대 중국 지식인들의 삶과 사상을 주로 연구하고 있어요. 특히 정치·사회·문화적으로 격동기이자 전환기였던 민국(民國) 시기 지식인의 정치 운명 및 학문적 정체성의 상실과 재건 과정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중국언어문화연구회 편집위원장 겸 연구윤리위원,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연구윤리위원 등을 맡고 있어요. 최근에는 『근현대 중국의 지식인들 - 인간을 묻다』(공저), 『임서가 들려주는 강호 이야기』(번역) 등의 책을 출판했어요.
무슨 시간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벼루에 먹을 갈아서 붓글씨를 쓰는 수업이 있었어요. 동네에 서예학원도 있었구요. 집에서 재미 삼아 붓으로 글씨를 쓰며 놀았던 게 생각납니다. 지금은 손글씨 쓸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어요. 탁탁탁- 자판을 두드리면 되는데, 굳이?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구요. 전화보다 카톡을, 손편지보다 메일을 선호하게 되었죠. 그렇지만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손편지를 받았을 때, 그 글씨를 보며 마치 그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은 그 느낌은 메일로는 전혀 느낄 수가 없어요. 편리함으로 사라져버린 소중한 가치, 손글씨도 서예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오늘의 악씨레터를 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독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