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우러진 매체를 말해요. 그런데 최근 글없는 그림책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어요. 그림책 연구자들은 그림책의 기원을 고대 동굴 벽화의 동물 그림이라고 얘기해요. 원시인들이 그린 벽화에는 그림이 이야기의 줄거리 순서대로 출현하므로 연속해서 보면 일종의 그림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치 원시시대의 동굴 그림처럼 요즘의 글없는 그림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과도 어울린다고 할 수 있어요. 얼마 전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우리나라 그림작가 이수지의 그림책 대부분이 바로 이 글없는 그림책에 해당하는데요. 글없는 그림책은 글자가 전혀 없거나, 몇 개의 단어 정도만 실려있는 책을 말하죠. 글없는 그림책은 소리없는 책, 텍스트없는 책(Textless Book), 글자없는 책(Wordless Book) 등으로 불려요.
글없는 그림책은 해석의 여지가 풍부하고 자유로운 상상과 추론이 가능해서 글자를 몰라도 책을 읽는데 큰 부담이 없어요, 그래서 난민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나 난독증(dyslexia) 어린이를 위한 읽기 수업에도 활용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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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페두사는 이탈리아 남쪽 끝에 위치한 섬으로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오는 난민들이 가장 먼저 정착하는 곳이에요. 유럽으로 오는 난민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특별한 장비도 없는 작은 배를 타고 이 곳으로 와요. 주로 전쟁과 가난을 피해 하루 평균 100~200명의 난민들이 목숨을 건 항해를 하지요. 이곳에 모인 난민들은 한동안 이민자 센터에 머물게 되는데, 여기에는 영아, 유아, 어린이, 청소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동청소년 문학계의 대표적인 국제기구 IBBY는 2012년에 ‘세계에서 람페두사로, 그리고 다시 세계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이 프로젝트는 람페두사 섬의 현지 어린이와 이민자 어린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최초의 도서관을 만들고, 언어와 관계없이 어린이들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소리없는 책을 모으는 것이죠. 그래서 IBBY 한국지부 KBBY도 이 사업에 동참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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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 아니라 IBBY 이탈리아 지부와 람페두사의 IBBY 도서관은 2020년 10월 1일, 구조선에 탑승한 어린이들에게 휴대용 글없는 책을 제공하는 ‘선상 도서(Books on Board)’ 시범 프로젝트도 시작했어요. 이 프로젝트는 지중해에서 구조선을 운영하는 NGO 단체인 파랑주의보(Sea Watch), 오픈 암스(Open Arms), 지중해(Mediterraneo)와 함께 진행한다고 해요. 각 구조선에는 소리없는 책, 접이식 카펫, 도화지, 크레파스 등이 담긴 빨간색 여행 가방이 제공되는데 어린이들에게 주는 일종의 환영 선물인 셈이죠. 구조 물품에 정서적 안정을 주는 책을 포함시킴으로써 난민들이 느낄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과 공포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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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안데르센상으로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한 이수지 그림책의 형식은 그 누구보다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수지는 그림책의 물리적 제본선을 활용하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서사로 구성한 경계 그림책 삼부작인 『파도야 놀자』 『거울속으로』 『그림자놀이』를 발표하면서 그림책 역사에 이정표를 세웠다는 찬사를 받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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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 삼부작에서 이수지는 글없는 그림책이 서사의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방식을 선보였어요. 이들 작품은 그림책의 물리적 성질을 재발견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아요. 바로 그림책에 대한 평면적인 접근을 거부했으며, 책의 물성은 시각적 재현의 걸림돌이라는 출판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렸기 때문이죠. 이수지는 책의 경계로 작용하는 책고랑을 오히려 현실과 판타지를 표현하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치환했어요. 또한 고정적인 제본 형식을 탈피하고 반사 기법, 그림자, 데칼코마니 기법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현실과 상상 사이를 오가고 있어요. 신선한 아이디어로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이수지의 작품을 직접 접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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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 개성이 있는 작품 가운데 시각적 문해력과 다양한 해석을 요구하는 글없는 그림책으로 이지현의 『수영장』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수영장』은 2015년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가 선정하는 최고의 그림책상을 받았고, 『뉴욕타임즈』 ‘2015 주목할 만한 어린이책’, 미국 공영라디오 NPR의 ‘2015 올해의 책’ 등에 선정되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도 수출되었어요. 『수영장』은 현실의 인물이 갖고 있는 내면의 심리적 문제를, 환상으로 드러나는 내적 탐색을 통해 극복하는 이야기예요.
『수영장』은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수면으로 설정하여 흑백과 컬러의 색상을 통해 정형화되지 않은 읽기를 유도하고 있어요. 작가는 의도적으로 말없는 형식을 사용하여 독자에게 ‘보이는’ 캐릭터와 이미지에서 ‘보이지 않는’ 줄거리와 대사를 상상하게 해요. 어린 소년과 어린 소녀는 누구일까? 물속에는 어떤 생물이 살고 있나? 소년은 정말 물속 생물을 보았을까? 저자는 독자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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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볼로냐 라가치 특별상을 받은 『도착』도 글자없는 그림책이에요. 오스트레일리아 숀 탠(Shaun Tan)의 작품으로 우리나라 사계절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이 그림책은 사실 아동이 읽기에는 좀 난해해서 성인과 아동 혹은 청소년이 같이 읽으면 더 좋은 그림책이에요. 이 책은 오스트레일리아 이민사를 다룬 그림책이면서 ‘세상 이민자와 망명객과 난민들에게 바치는 서사시’이고, 더 나아가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낯선 세계와 끊임없이 맞닥뜨리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도착』은 종이 위에 연필로 작업을 한 그림을 낡은 흑백사진처럼 처리하고 편집한 작품이에요. 작가는 총 841컷의 그림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어요. 주인공인 한 중년 남자가 낯선 나라로 떠나 먼저 정착한 다른 이민자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지요.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초청해 새로운 나라에 무사히 정착하게 돼요. 이 그림책을 이해하려면 인물의 심정이나 상황뿐 아니라 시각적인 형상물이나 배경, 분위기 등을 잘 살펴 은유와 상징을 파악해야 해요. 또 맥락을 통해 해석해야 할 부분도 꽤 많아요. 문화적으로 특정한 캐릭터를 피하기 위해 숀 탠이 만든 가상의 언어도 등장해요. 그리고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낯선 동물과 친해지는 문화 적응과정은 문화혼합의 이미지로 해석할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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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탠은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에 살면서 ‘소속감’이라는 문제에 고민하였기에 그의 문제의식을 작품에 잘 투영했어요. 『도착』은 모든 이민자와 망명객, 난민에게 바치는 그림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민자, 망명자, 난민이 가지는 소속감, 소외감, 갈등, 정체성의 문제는 세계시민교육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이지요. 그래서 이 책은 학교 현장이나 여러 기관에서 다문화를 이해하도록 교육하는데도 많이 활용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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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위즈너는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가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상상과 환상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글없는 그림책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요. 그의 『시간 상자』는 우리를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글자없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작가는 사실적 화법을 사용해 상상과 모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어요. 한 소년이 바닷가에서 모래놀이를 하다가 낡은 카메라를 줍게 되죠. 소년은 호기심에 카메라 속 필름을 인화하면서 멋진 판타지 세계를 접하게 돼요. 소년의 눈에서 카메라의 눈으로, 또 물고기의 눈으로 시선이 옮겨지며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작품이죠. 작가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조합해 가며 예상치 못한 충격과 당혹감을 만드는 초현실주의적 화법인 더페이즈망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어요.
사진에 담긴 수중 세계는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었죠. 더욱 놀라운 것은 한 소녀가 웃으며 들고 있는 사진 속에는 한 소년이 사진을 들고 있고, 다시 그 소년의 사진 속에는 다른 소녀가 사진을 들고 있었어요. 돋보기로 들여다볼수록 사진 속의 아이가 또 사진 속의 아이를 보여주고, 다시 사진 속의 아이들이 끝없이 이어져요. 처음에는 돋보기로, 다시 현미경으로 사진을 들여다보며 확대를 해 나가면 사진 속 아이들은 현재의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인종과 피부색, 의복과 사는 곳이 다른 이 아이들은 다른 세계, 다른 배경, 다른 문화권, 심지어 다른 시간 속에 속해있음을 깨닫게 되죠.
소년은 마지막에 어떤 방식으로 오래된 과거 속 인물들과 만나게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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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소통에 도움이 되지만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 요소로 다가오죠. 그래서 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고요. 그러나 글없는 그림책은 온전히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하기에 글자를 몰라도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느낌대로 책을 읽을 수 있어요.
마음껏 상상하고 해석의 폭이 넓어, 다양한 각도로 생각하고 이해해도 제약이 없는 소리없는 그림책에 담긴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좀 더 많은 책을 알고 싶다면 IBBY에서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수집한 소리없는 그림책 모음(Silent Books Collection) 추천작 및 아너리스트를 살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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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책 #이수지 #이지현 #숀탠 #데이비드위즈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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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문학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부설 동양문화 고급과정에서 한문을 공부했어요. 저서로 『중국 그림책의 출발-아동세계』가 있고, 고전 계몽서 『제자규(弟子規)』와 중국의 저명 작가 차오원쉬엔의 그림책 『마오마오가 달린다』, 루쉰이 중역한 『금시계』를 번역했어요. 최근에는 대만의 백색 테러기간 뤼다오에서 복역을 마치고 아동잡지 『왕자』를 창간한 차이쿤린의 일대기를 다룬 그래픽 노블 『대만의 소년』 공동 역자로도 참여했어요. 앞으로도 중국과 대만, 그리고 우리나라의 아동문학 교류 현황을 살피면서 중국과 대만의 좋은 책을 찾아 우리나라에 소개하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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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박은혜 악씨레터 2기 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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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도시 전체가 하나의 역사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경주를 여행하면서,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불국사, 첨성대, 대릉원, 월지 등 유명한 유적지들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곳은 감은사지와 황룡사지와 같은 폐사지였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했던 건축물들은 다 사라지고 남은 건 황량한 벌판과 잔해들뿐이었지만, 여행자는 천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그 텅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건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었습니다.
『보건교사 안은영』 『시선으로부터』를 쓴 소설가 정세랑의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바로 그 천 년 전 시공간을 배경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소설입니다. 죽은 오빠를 대신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주인공 ‘설자은’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펼쳐집니다. 비상한 기억력과 추리력을 가진 자은은 미스터리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망국 백제 출신으로 다재다능한 식객 목인곤과 함께 이 사건들을 해결해 나갑니다. ‘월지’와 같이 여행자들에게도 익숙한 장소와 역사 속 실존했던 인물들, 그리고 문헌에서 발견된 당시 문화를 쌓아 올려 만든 배경에서 ‘자은’과 ‘인곤’의 캐릭터는 선명해지고, 미스터리는 이질감 없이 녹아듭니다.
꼭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경주 여행이 인상 깊었다거나, 경주 여행을 하고 싶은 분이라면 한 번 읽어보길 추천합니다. 천 년 전 ‘경주’가 궁금했던 분들에게도요. 보통의 여행 안내서와는 다른 매력으로 여러분을 천 년의 고도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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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이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림책의 매력인 것 같아요.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는데요. 이런 소리없는 그림책은 어쩜 언어라는 매체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한계도 지워버린 듯 합니다. 저희 아이들이 볼 때 같이 봤던 에런 베커의 여행 3부작, 추천합니다. 책을 열면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가 펼쳐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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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최근 본 영상이 꼭 데이비드 위즈너의 『시간 상자』를 연상케 해서 소개하고 싶었어요. 작가의 엄청난 노력이 돋보여요!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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