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현대사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참 많아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공산주의에 날을 세운 군사 독재정권의 계엄령으로 인한 탄압도 겪었고요. 그리고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최근에는 과거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분위기까지 말이지요.
50년의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국민당이 대만으로 넘어왔어요.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와 군대는 정치권력과 경제권을 장악하고 항일 인사들이나 좌파 지식인들을 탄압하면서 사회는 극도의 불안과 격심한 혼란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어요. 1947년 2월 28일, 담배를 팔던 노인이 단속반에 걸려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이 과정에서 항의하던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자 이에 대항하여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어요. 위기의식을 느낀 국민당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이것이 바로 대만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2·28사건’이지요. 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 1949년에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죠.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게 떠밀려 대만으로 왔기에 거의 병적으로 반공주의를 강화했고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은 모조리 탄압했지요. 사람들은 함부로 모일 수도,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고 글이나 노래도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만 했어요. ‘백색테러 시대’라 불리는 이 억압의 통치는 1987년까지 무려 38년간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이 여러 구실로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었어요.
이 백색테러 시기를 이야기하는 여러 매체가 있는데, 그 가운데 그림책과 게임, 영화, 그리고 그래픽 노블을 살피면서 이들이 외치는 역사의 소리를 들어볼까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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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는다면
‘위대한 기차’는 다시 돌아올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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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국제도서전(2024.6.26~30) 대만 초청작가로 황이원(黃一文)이 우리나라를 다녀갔어요. 황이원은 최근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현재까지 3권의 그림책을 출간했고, 각 작품이 평론가들과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요. 그중에『옛날 옛날 기차가 작은 섬에 왔어요』는 암울했던 백색테러를 배경으로 한 그림책이에요. 이 그림책은 2021년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입선 및 대만 문화부에서 주관하는 제46회(2022년) 금정상(金鼎獎)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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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예전에 정치범 수용소였던 공간을 ‘기차’로 표현함으로써 그 공간이 담고 있는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어요. 겹겹의 철문 뒤로 늘어선 좁고 텅 빈 감방들은 마치 길게 이어진 기차 안에 사람들이 실려 있는 것 같았대요.
기차는 분명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 옛날 수많은 청춘을 실어 갔고 움직이지 못하는 이 기차 안의 사람들은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목적도 의미도 없는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사라졌고 이들의 인생과 이상은 모두 보이지 않는 창밖 풍경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어요. 기차는 모든 화면과 공간, 전체 이야기를 관통해요. 갑자기 나타난 기차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사람들과 사물을 제 맘대로 실어 가 버렸어요. 거대한 기차는 제멋대로 규칙을 정하고,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했어요. 기차가 정한 규칙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그들 좋을 대로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해 버렸지요.
“잘 들어라! 위대한 기차가 왔다! 보잘것없는 섬에 너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위대한 기차가 정한 규칙만 잘 지키면, 너희는 더 강해지고 잘살게 될 것이다.”
위대한 기차에 태워진 수많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하고자 하는 이 그림책은 어두운 색과 거친 선, 암울한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대만의 어둡고 아픈 역사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그림책 속 나지막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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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잊은 것인가 아니면 기억해 내기가 두려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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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계엄시기를 이야기한 게임과 영화도 있어요. 먼저 호러게임인 <반교(返校): 디텐션>은 2015년 9월 레드 캔들 게임회사가 만들었어요. 이 게임은 2017년에 출시되어 2019년 9월 6일 구글플레이에 올리면서 주목을 받았다고 해요. 게임은 대만 특유의 도교·불교에 대한 민간적 요소를 접목하여 백색테러 시기의 폭력을 직접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나타냈어요.
이후 게임을 바탕으로 쉬한창(徐漢強) 감독이 영화로 제작한 <반교: 디텐션>이 2019년 9월 20일 대만에서 처음 상영되었어요. 영화는 제56회 금마장 시상식에서 5관왕, 제22회 타이베이영화제에서 6관왕을 차지하였고, 2019년 대만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기도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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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게임 <반교: 디텐션>, (우)영화 <반교: 디텐션> / 출처: 대만 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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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교>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학교(校)로 돌아가다(返)’ 혹은 ‘구류, 감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요. 그동안 학교를 배경으로 한 많은 공포영화가 있었지만, 이처럼 역사의 비극을 온전히 마주한 영화는 제가 알기론 없는 것 같아요. 영화는 1960년대 대만의 군사 독재시기가 주된 배경으로 팡루이신(方芮欣)이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조금씩 떠올리는 내용이에요. 즉 1949년 이후 38년 56일 동안 계엄의 역사 속에서 자행되었던 국민당 정부의 폭력과 탄압이 만든 비극의 기억을 직시하고 있어요. 국민당은 계엄 유지를 위해 학교 통제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고, 영화는 이 시기에 정부에서 금지한 책을 읽은 죄로 감금되어 총살형을 받은 교사들과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이지요.
여고생 팡루이신은 장밍후이(張明暉)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약간의 오해로 장밍후이가 이끄는 독서회를 학교 당국에 고발해 버려요.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던 장밍후이를 포함한 모든 독서회 학생들과 교사들이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게 되죠. 팡루이신은 자신의 밀고로 선생님과 학생들이 고문을 받고 죽었음을 알게 돼요. 그래서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기억을 상실한 채 귀신이 되어 학교를 떠돌아다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던 웨이중팅(魏仲廷)의 무의식과 만나 비극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의 파편들을 맞추어 나가요.
그런데 영화는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웨이중팅은 고문의 공포 속에서 장 선생님의 유언대로 살아남기 위해 전략적 전향을 선택하여 살아남았어요. 웨이중팅은 전향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역사적 책무를 가진 인물들을 대표하기도 해요.
우리나라도 80년대 민주화운동이 학원가를 장악했었죠. 여러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문으로 장애를 입기도 했고, 개인적인 안위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열악한 환경의 노동현장에 뛰어들거나, 다양한 자리에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꽃 같은 청춘들이 있었지요. 희망이 옅어져 가는 순간에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의 노래를 목청 터지게 부르기도 하면서요.
우리는 아픈 이야기를 잊었을까요? 아니면 기억하기가 두려운 걸까요? 이제는 희미해진 역사 속 한 자락이 되어버렸지만, 막바지 더위 속에서 ‘아아’ 한 잔을 마시며 <반교: 디텐션> 영화나 넷플릭스에 올라온 드라마를 보며 잠시 생각해 봐도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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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신동순, 「타이완 공포영화 <반교: 디텐션(返校: Detention)>의 공포의 역사와 기억의 조각들」, 『중국소설논총』, 2022.
씨네21, 「<반교: 디텐션> 존 쉬 감독 대만 역사에 기반한, 대담한 공포영화」, 『씨네21』,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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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실패는 꾸준히 노력할 용기를 잃는 것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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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 『대만의 소년(來自清水的孩子)』은 대만 국립 타이둥대학교 유페이윈(游珮芸) 교수와 그의 제자인 그림작가 저우젠신(周見信)이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에요. 이 책은 대만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상을 수상하여 현재 7개국에 번역되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올 6월에 선을 보이면서 서울국제도서전 대만관에 전시되기도 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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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대만의 타이중 칭수이에서 태어난 차이쿤린(蔡焜霖)으로 이 책은 그의 어린 시절, 옥중생활, 전성기, 그리고 황혼기의 4권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차이쿤린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소 책을 좋아하여 고등학생 때 독서회에 참가했어요. 하지만 금지된 책을 읽은 탓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뤼다오라는 섬에서 수형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어요. 10년을 복역하고 사회에 나온 차이쿤린은 전과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만화를 주로 다루는 출판사에 취직했어요.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가 만화 검열제도를 강화하자 옛 동료들과 새로운 형태의 잡지를 발행하기로 결심했어요. 페스탈로치 같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차이쿤린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종합잡지를 만들었어요. 그가 만든 『왕자(王子)』 잡지는 1950~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초·중학생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어요. 이후 광고회사와 생명보험회사에서 일하면서 대만의 신여성을 겨냥한 『논노』 잡지 창간과 『백과사전 전집』을 출간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은퇴 후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인권교육 활동에 매진하다가 2023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일제시기를 거쳐 국민당이 대만어 사용을 금지했기에 일본어와 대만어, 중국어를 혼용해서 쓰고 있어요. 그리고 각 권마다 주인공의 삶을 묘사하는 그림체와 배경색이 두드러지게 달라서 대만의 역사와 사회문화 환경을 이해하기 좋아요. 이 책은 무엇보다 과도하게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을 펼치지 않는 잔잔한 묘사가 장점이에요. 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와 어려움을 겪고 다시 일어나는 삶은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오죠.
특히 차이쿤린과 함께 살아남은 동료들이 뤼다오 섬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기억하며 부르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노래는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도 2009년 팝페라 가수 임형주에 의해 소개되어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 대통령 등의 추모곡으로 불린 이 노래를 조용히 읊조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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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 앞에서 울지마오
나는 거기 없소 나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오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나는 이미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저 넓은 하늘 위를 지나가네
가을에는 들판 사이에 흩뿌려지는 햇빛이 되고
겨울에는 다이아몬드같이 빛나는 하얀 눈이 되어
아침에는 당신을 깨우는 새가 되고
밤에는 당신을 지키는 별이 되어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나는 이미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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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백색테러 #황이원 #반교:디텐션 #대만의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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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문학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부설 동양문화 고급과정에서 한문을 공부했어요. 저서로 『중국 그림책의 출발-아동세계』가 있고, 고전 계몽서 『제자규(弟子規)』와 중국의 저명 작가 차오원쉬엔의 그림책 『마오마오가 달린다』, 루쉰이 중역한 『금시계』를 번역했어요. 최근에는 대만의 백색 테러기간 뤼다오에서 복역을 마치고 아동잡지 『왕자』를 창간한 차이쿤린의 일대기를 다룬 그래픽 노블 『대만의 소년』 공동 역자로도 참여했어요. 앞으로도 중국과 대만, 그리고 우리나라의 아동문학 교류 현황을 살피면서 중국과 대만의 좋은 책을 찾아 우리나라에 소개하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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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반교: 디텐션>은 저도 이전에 플레이 해보았는데요. 너무 무서워서 하다가 중단했어요.😱 게임, 영화, 책으로 만들어져서 함께 그 기억을 공유하고, 기록하고, 나아가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응당 문화콘텐츠가 담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소개된 책과 영화 꼭~! 보려구요. 『대만의 소년』 무척 기대됩니다!! 요즘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가 참 핫한 것 같아요. 저는 최근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그래픽 노블로 읽었는데요, 쉽게 잘 읽혀지더라구요. 그래픽 노블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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