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유산의 무게에 휘청이는
007의 부활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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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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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를 배경으로 갖가지 특수 장비와 액션 활극, 다채로운 로케이션 등이 찬란하게 펼쳐진 007시리즈는 1928년 프리츠 랑이 영화 <스파이>로 스파이 영화의 계보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성공적인 스파이물로 자리를 잡아 왔습니다. 오랜 시간 ‘스파이의 전형’으로 인식되어왔던, 그리고 할리우드가 그토록 질투해 마지않았던 캐릭터 제임스 본드는 사실 그 자체가 ‘영국’을 강하게 투사하고 있는 캐릭터입니다. MI6로 유명한 영국의 정보력은 일찍이 16세기부터 그 위력을 떨쳐왔죠. 16세기 당시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상황에서 스파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영국은 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활발한 스파이 전략을 구사해왔습니다.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를 집필한 조엘 레비는 16세기경 여왕 시해 음모를 사전에 차단했던 프랜시스 월싱엄을 본격 스파이의 시초로 보고 있을 정도예요.
아무튼 스파이 업계에서 이렇듯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영국인지라 최고의 요원 007이 영국 태생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수트, 항상 보드카 마티니만을 주문하며 ‘젓지 말고 흔들어서’ 달라고 하는 세심한 취향,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정직하게 예의를 갖추는 깔끔함, 게다가 유머와 여자와 도박을 좋아하는 풍류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정형화된 제임스 본드의 컨벤션들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영국 신사’ 그 자체를 투영하고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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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기 때문에, 재밌게도 007시리즈가 주춤거리거나 당황스런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거기에는 영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의 주춤거림과 당황스러움이 짙게 배어들어 있기도 합니다.
간단히 살펴볼까요? 1962년에 <007살인번호(Dr.No)>가 등장한 이래로, 007시리즈는 1-3년을 주기로 꾸준히 제작되어왔습니다. 후속작 개봉까지 3년을 채 넘지 않던 시리즈의 제작 주기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89년, <살인면허(Licence To Kill)>가 제작된 이후입니다. 1991년 12월 말에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죠. 그동안 시리즈의 근간을 형성했던 냉전시대가 종식되고 나자, 전통적인 ‘적’이 없어진 세상에서 본드는 새로운 적을 찾기 위해 고심합니다. 그리고 6년 만인 1995년에 돌아온 피어스 브로스넌의 제임스 본드는 그 대안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유럽 마피아, 거대 미디어 자본, 석유재벌 등에 이르는 이 시기 본드의 주적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는 007시리즈의 ‘소련 대체자 찾기’ 과정에 다름 아니었죠. ‘숀 코너리 이후 가장 완벽한 본드’라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피어스 브로스넌의 본드가 마주했던 적들은 큰 한계를 갖고 있었어요. 이전까지의 주적이 ‘공산권’이라는, 말하자면 세계급 스케일을 지닌 대상이었던 데에 비해서 새로운 적들은 스케일 상 이전의 주적을 따라갈 수 없었던 거죠. 그러나 영화의 스펙터클은 최소한 일정하게 유지시켜야 했기에 이들의 능력치는 한없이 커져만 갔고, 그 결과 007시리즈는 현실성을 잃고 다분히 판타지스러운, 전형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물처럼 변해갔습니다. 이에 대한 제작진의 고뇌와 한계가 함께 담겼던 작품이 바로 2002년에 개봉한 <어나더데이(Die Another Day)>였어요. 주적을 ‘북한’이라는 국가급 스케일로까지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제 수준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스케일의 음모를 욱여넣은 탓에 현실성을 거의 잃어버렸던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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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시리즈가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풍길 때쯤,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2002)가 등장합니다. 로버트 러들럼의 원작을 옮긴 이 영화는, 다들 아시다시피 스파이 장르를 근본부터 재정립시킨 걸출한 명작입니다. 모두가 잊고 지내다시피 했던 생 날 것의 느낌인 제이슨 본의 모습을 보면서, 거의 모든 관객들은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제임스 본드의 시대는 끝났구나, 라는 것을 말이죠.
관객들만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007시리즈의 제작자들도 같은 것을 느꼈어요. 아무 데서나 본명을 내뱉고 섬세하고 까다로운 취향을 과시하며 능글맞은 섹스어필의 소유자인 영국 신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으리라는 것은 이제 자명해 보였으니까요. 바로 이 지점에 3년을 뛰어넘는 시리즈의 공백기가 또 한 번 자리합니다.
4년여의 숙고를 거쳐 다시 등장한 본드는 뒤바뀐 시대적 취향을 철저히 반영한 작품이었습니다. 프리퀄에,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본드의 모습이었죠. 이언 플레밍이 너무나 아낀 나머지 영화화를 반대했다는 원작 시나리오인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2006)을 시작으로, 이어진 <퀀텀 오브 솔러스(Quantum of Solace)>(2008)까지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는 이전까지의 모든 본드 영화들을 부정하는 듯한 모습으로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능수능란한 최고의 스파이였던 본드는 이제 갓 더블오(00) 요원이 된 우악스런 신출내기로 둔갑해버렸죠. 프리퀄의 이름을 달고 나온 너무나 다른 성격의 본드. 이제 이 시리즈의 과제는 완전히 뒤바뀐 본드 캐릭터를 어떻게 설득력 있게 끌고 가느냐 하는 점인 것 같았습니다.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제이슨 본드’라는 혹평에는 어떻게 맞서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도 관심의 대상이었죠.
개인적으로 1990년대 이후 최고의 007 영화라고 생각하는 <스카이폴(Skyfall)>(2012)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역시 4년의 공백을 안고 나타난 본드. 시리즈의 새로운 방향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시리즈의 누적된 50년을 기념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위치에 선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카이폴>은 또 한 번 모두의 짐작을 빗겨나가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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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폴>의 본드는 더 이상 풋풋하고 혈기에 가득 찬 신출내기 신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요원 직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쇠락한 퇴물 취급을 받는 존재였죠. 더구나 <스카이폴>에서 본드가 대면한 주적은 다름 아닌 MI6 내부의 존재입니다. 옛 실력파 요원이었던 실바가 바로 그 적이죠. <골든아이>의 006과 유사한 상황이지만, 006이 핵으로 세계를 멸하려고 했던 반면 <스카이폴>의 실바가 원하는 것은 개인적 복수, 즉 MI6의 시스템에 대한 테러입니다. 이런 갈등구조는 이전까지의 양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계를 위협하는 이데올로기나 국제적 범죄조직이 아닌 MI6 내부의 갈등이라는 점, 이는 007시리즈 그 자체가 처한 상황을 투영하는 것이며, 나아가 영국(과 영국 정보기관)이 처한 현재적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M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유니언 잭이 새겨진 불독은 의미 없는 소품이 아닙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skyfall)과 같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이 영화는 스스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들을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함축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리즈의 부활(resurrection)을 이야기합니다. 이전의 두 편이 본드의 새로운 모습을 시도한 것이었다면, <스카이폴>은 그 시도들을 기반으로 해서 시리즈의 완전 부활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의 부활이 될 것인가? 그 힌트를 주는 인물은 Q(벤 위쇼 분)입니다. 폭발하는 펜이나 미사일이 발사되는 자동차 등 본드 영화의 주요한 볼거리였으면서 동시에 클리셰로 기능했던 특수 가젯들을 ‘구시대적’이라고 단정 지으며 이전까지의 시리즈들과 분명히 선을 긋는 Q의 태도는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을 향한 일종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방식은 현대적인 것을 따르되 시리즈가 구축해온 가치마저 저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007시리즈라고 볼 수 없겠죠. <스카이폴>은 시리즈가 남겨준 유산을 성실히 이어가겠다는 것도 천명합니다. 본드의 애마로 복귀한 애스턴 마틴은 이에 대한 명료한 상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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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대체 왜, 007시리즈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살아남아야 하는가? 007시리즈의 존재 가치에 대한 답변은 청문회장에 선 M의 입을 통해 흘러나옵니다.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가 그것입니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또한 많은 것이 남아 있으니,
예전처럼 천지를 뒤흔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영웅의 용맹함이란 단 하나의 기개,
세월과 운명 앞에 쇠약해졌다 하여도
의지만은 강대하니,
싸우고 찾고 발견하며
굴복하지 않겠노라.
Though much is taken, much abides; and though
We are not now that strength which in old days
Moved earth and heaven; that which we are, we are;
One equal temper of heroic hearts,
Made weak by time and fate, but strong in will
To strive, to seek, to find, and not to yield.
이 시는 세계 평화라는 거시담론을 유지하는 것은 오늘날 유효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제작진의 대답입니다. ‘실체 없는 악의 무리에 대항해 영국을 지키기 위해’ 구식처럼 보이는 첩보활동은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한다고 M은 말하죠.
그리고 그 M이 퇴장합니다. 일전에 본드가 M의 자택에 잠입해서 M과 대화를 나눌 때, “M이라는 코드명이 그런 의미인 줄은 미처 몰랐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대화를 기억하는 관객들은 M의 퇴장과 새로운 M의 등장 앞에서 이 ‘M’들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스카이폴>에서는 노골적으로 주디 덴치의 M에게 ‘Mother’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습니다. ‘Mother’가 물러난 자리에 새로 등장한 M은 무엇일까요. 국가의 명령에의 절대적 복종을 상징하는 ‘Master’일까요?
베스퍼 린드만을 사랑했지만 그녀를 잃고만 본드, 현장 임무에서의 트라우마로 행정직으로 자리를 옮긴 머니페니, 냉전 종식 이전과 같이 남성으로 돌아온 M…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 3부작이 남긴 이 같은 파편들은 프리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전의 본드로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는 하나 하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카이폴> 이후에 등장한 두 편의 본드 무비는 여간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스카이폴>은, 냉전시대로부터 출발해 장장 50년을 이어온 시리즈물에 대한 헌사 그 자체이자, 앞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였습니다. 그런 <스카이폴>이 흥행과 비평 양단에서 찬사를 받게 되니 제작진의 부담이 가중되었던 것일까요? <스펙터>(2015), <노 타임 투 다이>(2021)는 모두 이전 시대 본드 무비의 걸출한 빌런들을 소환하면서 본드 무비의 역사와 전통에 오마주하기 바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들은 모두 <카지노 로얄>이 비워내고 덜어내려 애썼던 바로 그런 면모들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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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007의 제작사 이언 프로덕션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뒤를 이을 새로운 제임스 본드 역 배우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식적인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호사가들은 애런 테일러 존슨을 강력한 후보로 점치고 있는 상황인데요, 앞으로의 007, 제임스 본드 무비는 어떠한 면모를 새롭게 보여주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될까요? 귀추가 주목되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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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S
#제임스본드 #스파이물 #에스피오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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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김세익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트랜스아이덴티티 이론으로 MCU를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러 대학에서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디지털 게임, 한류 등등에 대해 가르치고 있어요. 이야기가 들어있는 여러 분야의 스토리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잡식성 스토리텔링 연구자예요.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 공간, 디지털, 게임, 브랜드, 디자인 등등을 좋아하고 연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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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외곽에 자리 잡은 ‘꿈미래실험공동주택’.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기반 시설도 부족하지만, ‘세 자녀를 가질 것’을 약속하면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입주할 수 있는 이곳. 네 부부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웃이 됩니다. 그들은 이웃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묶여, 공동 육아를 꿈꾸고, 자가용을 공유하며, 쓰레기 분리 배출까지 함께하게 됩니다.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를 다하려는 이들은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작가는 이러한 터무니없지만 현실에 있을 법한 상상을 통해, 저출생, 주거난, 성별 분업, 돌봄 노동, 공동체 등 여러 사회 현안에 대한 정부의 피상적인 이해와 도구적인 대책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 어떤 사회과학 연구보다도 우리 사회를 깊이 꿰뚫는 <네 이웃의 식탁> 앞에 잠시 앉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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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루는 춥고, 하루는 덥고, 날씨가 무척이나 변덕스러워요. 면역력이 떨어지기 쉬운 이때, 비타민 가득한 과일 드시면서 다들 건강 잘 챙기세요. 사과값이 정말 놀라운데, 저는 왜 자꾸 사과만 먹고 싶을까요?🧐 오늘의 악씨레터는 007 영화 종합선물세트(혹은 비싼 과일 가득한 과일바구니!!) 같아요. 이 계보를 따라가며 007시리즈 정복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구병모 작가의 소설 <파과>를 읽고, 뮤지컬 파과를 보았는데요. 악씨레터’s Pick에 같은 작가의 책 <네 이웃의 식탁>이 소개되어 너무 반갑습니다! <파과>를 재밌게 읽었던 터라 이 책 역시 기대가 됩니다.🤗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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