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물,
현대의 신화인가 현대인의 자화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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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쁜 마음으로 구독하며 읽어오던 악씨레터에 필진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되어서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악씨레터에 띄우는 저의 첫 번째 글로는 학위논문의 주제까지 되어 주었던 제 덕질의 주된 토양- 슈퍼히어로물에 관한 것으로 준비해보았습니다.
사실 다들 아시다시피, 슈퍼히어로물 붐은 지난 2019년에 마블의 <어벤저스: 엔드게임>으로 정점을 찍은 후에 완연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죠.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주제로 고생하며 학위논문까지 썼으니 최소 한 10년 정도는 어디 가서 특강도 하고, 칼럼도 쓰고 하면서 MCU라는 주제에 대해 우려먹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세상에나 네상에나... 이렇게 거짓말처럼 만들어지는 영화마다 폭망을 거듭하면서 팬덤이 더 이상 붙어 있으려야 도저히 붙어 있을 수 없는 현실까지 치닫게 줄이야! 디즈니와 워너의 주주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분노가 차오르는 상황이라 아니 말할 수 없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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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필연적인 질문이 대두됩니다. 슈퍼히어로 콘텐츠의 수명은 정말로 다한 것인가? 정말로 관객들은 슈퍼히어로 콘텐츠를 지겨워하기 시작한 것인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로만 헤아려도 <슈퍼맨>(1978)이후 거의 오십 년 간 전 세계 관객을 대상으로 꾸준한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하나의 장르처럼 입지를 다져왔습니다. 수십 년 간 여러 세대를 넘어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다는 것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고정된 특정 팬덤에게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보편적 관객에게 소구하는 바가 명확히 존재한다는 방증일 겁니다. 분명한 가치를 지니지 않고서는 이러한 장기간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상업영화 시장인 까닭이죠. 그렇다면 최근 개봉작들의 폭망과 그로 인한 팬덤의 외면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저는 이것이 슈퍼히어로라는 장르 또는 주제의 한계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그 영화들을 잘 못 만들어서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슈퍼히어로물은 코믹스나 블록버스터 영화나 모두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보여주는 장르물입니다. 그렇기에 가치가 있고, 그렇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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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물은 신화적인 이야기일까요?
많은 언론 매체나 연구자들이 슈퍼히어로 콘텐츠에 대해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는 ‘현대의 신화’라는 수식입니다. 사실 코믹스나 드라마, 영화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는 스토리텔링 측면에서 그리스·로마 신화 등에서 익히 보아오던 영웅신화적 행보를 보입니다. 예컨대, 슈퍼맨이 영유아 시절 고향 행성 크립톤에서 로켓에 실린 채 홀로 지구로 떠나오는 장면은 갈대 상자에 담겨 강물을 따라 홀로 떠나보내진 성경 속 모세의 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 아이언맨이 당대 기술 범위를 초월하는 첨단의 아이언맨 슈트를 개발하는 과정이나 어벤져스 팀에 각종 첨단 무기 및 물자를 제공해주는 모습은 그 자체로 최고의 기술을 지닌 대장장이 신이자 신들의 전쟁에서 올림포스 신들에게 무기와 물자를 만들어 제공해주던 헤파이스토스의 서사에 다름 아니죠. 심지어 원더우먼은 <원더우먼>(2017)에서 그리스 신화 속 전쟁의 신인 아레스와 맞붙어 싸우고, 나아가 MCU의 토르에 이르면 그는 그 자체로 북유럽 신화를 재해석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슈퍼히어로 콘텐츠를 ‘현대의 신화’라고 해석하는 관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결코 신화적 성격을 띤 이야기라고 할 수 없어요. 왜 그런지 살펴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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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좌) painting by René-Antoine Houasse(1706) / (우) ⓒMarvel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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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 유대 신화 등 대부분의 신화를 보면 인간은 신의 하위 등급에 위치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신화 속 인간들이 지닌 고유한 자율성과 사고력, 지능 및 능력은 모두 신으로부터 부여받거나(피조물), 최소한 신의 하위 호환적 능력으로 제한되는 모습을 보이죠. 즉, 신화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신보다 열등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신화적 세계관에서 소위 말하는 ‘초월적 존재(슈퍼한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서 보통의 인간이 갖는 무능함과 무력함을 전제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슈퍼히어로 콘텐츠에서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문예사조와 연관된 명제인데요, 슈퍼히어로물이 태동하기 시작한 1930년대는 문예사조상 인간생활을 파헤치던 사실주의와 니체의 현실주의가 이미 지나간 이후의 시대이며 실존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입니다. 해당 시기에 철학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문화적으로 아주 강한 영향력을 떨쳤던 철학자 중 한 명이 니체인데요, 니체의 위버멘쉬(초인) 개념은 ‘신이 없는 시대에 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강력한 인간의 이상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용어 위버멘쉬(Übermensch)를 한 번 보시죠. 위버멘쉬는 Über(super)와 mensch(man)의 합성어로, 영어로는 Superman으로 번역되는 학술어입니다. 아니 그런데 슈퍼맨? 슈퍼맨은 1939년에 코믹스로 발행된 최초의 현대적 슈퍼히어로의 이름이 아닙니까? 네. 그래서 이 최초의 현대적 슈퍼히어로의 이름이 니체의 초인(Übermensch, Superman)과 똑같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슈퍼히어로 콘텐츠는 언제나 ‘강한 인간’, 또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슈퍼히어로물은 개념적으로 신화가 아닌 ‘반신화(Antimyth)’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슈퍼히어로 콘텐츠의 주인공은 언제나 ‘보통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노출합니다. 예를 들어 슈퍼맨은 본래 크립톤이라는 외계 행성의 평범한 구성원인 칼-엘입니다. 그는 단지 우연히 정착한 지구의 노란 태양이 그의 신체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초월적인 능력을 후천적으로 얻게 되었을 뿐입니다. 또, MCU를 기준으로 볼 때 토르는 본래 지구인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던 존재이지만 그의 신체적 월등함은 단지 아스가르드라는 외계 종족이 가진 신체적 특성일 뿐으로 묘사되죠. 심지어 <토르>(2011)에서는 토르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아스가르드인으로서의 모든 힘과 능력을 잃고 평범한 지구인이 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요, 이것은 관람객들이 토르에 감정이입을 좀 더 용이하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보통 인간이 이상적 인간상으로 상승하는 구도’를 위한 서사적 장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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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물은 이상적인 인간상에 관한 이야기!
물론, 슈퍼히어로 콘텐츠에 신적 능력을 지닌 캐릭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다양한 슈퍼히어로 콘텐츠에 신적 권능을 지닌 존재가 묘사되긴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콘텐츠의 신적 존재들은 인류의 구원자 포지션이 아닌 ‘주인공에 대항하는 악당’의 역할로 등장한다는 점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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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좌)DC, Warner Bros. / (중)(우)ⓒMar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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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슈퍼맨2>(1980)와 <맨오브스틸>(2013)에서는 슈퍼맨과 동등한 능력을 지닌 크립톤인 조드 장군과 그 휘하 대원들이 신적 능력을 지닌 악당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칼-엘이 지구에서 새롭게 갖게 된 강대한 힘이 ‘인간성으로 그것을 억제하지 않을 때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의도적인 슈퍼맨의 거울-쌍의 모습이에요. 즉, 조드 장군과 그 휘하의 존재는 슈퍼맨을 슈퍼맨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육체적 능력이 아니라 인간성임을 드러내 보여주는 장치인 셈이죠.
또, 어떤 슈퍼히어로 콘텐츠에는 작정하고 신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닥터스트레인지>(2016)의 도르마무, <가디언즈오브갤럭시Vol.2> (2017)의 셀레스티얼(에고) 등은 그 전능에 가까워 보이는 능력으로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을 연출하는데요. 이들에서 드러나는 서사적 구도는 다분히 인간적으로 그려지는 주동인물과 대비하여 ‘신의 권능을 인간의 능력으로 투쟁하여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사적 구도는 인간을 신의 하위적 존재 내지는 신의 계도가 필요한 불완전한 피조물의 개념으로서 바라보던 옛 신화적 관점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죠.
그래서 슈퍼히어로 서사는 신화적 구조를 단순 차용한 ‘현대의 신화’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앞서 ‘슈퍼맨-모세’, ‘아이언맨-헤파이스토스’ 등의 언급에서 확인했던 슈퍼히어로 서사에 담겨있는 일부 신화적 요소들의 흔적은 오늘날 콘텐츠 서사 구조 속에서 ‘신화’가 ‘문화원형(Cultural Archetype)’ 개념으로 활용되고 있는 사례라고 해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슈퍼히어로 캐릭터 또는 서사를 신화분석 이론에 대입하여 해석하는 대부분의 연구는 고대 신화의 영웅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문화원형적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합니다. 이것은 슈퍼히어로 캐릭터(또는 서사)가 지니는 기본적인 속성이 ‘신화적 원형성’일 뿐, ‘신화 체계’ 그 자체는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지요.
요컨대, 오늘날 슈퍼히어로 콘텐츠 속에서 ‘신은 죽었지만 신의 형상은 신화적 원형성이라는 문화원형의 형태로 인간의 이상향적 캐릭터 속에 투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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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S
#반신화 #위버멘쉬 #이상적인간상 #문화원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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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김세익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트랜스아이덴티티 이론으로 MCU를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러 대학에서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디지털 게임, 한류 등등에 대해 가르치고 있어요. 이야기가 들어있는 여러 분야의 스토리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잡식성 스토리텔링 연구자예요.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 공간, 디지털, 게임, 브랜드, 디자인 등등을 좋아하고 연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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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무대입니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와 미스테리한 미궁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와 스릴러, 판타지를 오가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때문입니다. "The Phantom of the Opera" "The Music of the Night" 같은 멋진 넘버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뮤지컬의 무대가 이렇게 스펙터클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선물하는 샹들리에의 장면 때문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국내에서 공연된 이 라이선스 뮤지컬은 아쉽게도 2023년 시리즈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시리즈 공연의 끝을 잡기 위해 지난 2월 대구 계명아트센터로 쫓아가 조승우의 넘버를 듣고 왔습니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은 분명히 오래지 않아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겁니다. 그때가 되면 꼭 기회를 잡으세요! 넘버와 스토리, 스펙터클이 빚어내는 감동의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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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기 악씨레터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요. 오늘 메일 열면서 눈치채셨나요? ①악씨레터 메일 발신자가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에서 악씨레터로 변경되었구요. ②레이아웃이 악씨의 아이덴티티 색상인 상콤 노랑으로 바뀌었어요. 움직이는 악씨레터 로고도 보이시죠.😎 ③보라색 볼드체가 보인다면 클릭해 보세요. 관련 내용을 링크해 놓았습니다. ④ 악씨레터's Pick 코너가 새롭게 신설되었습니다.💖 문화콘텐츠와 관련된 정보는 어디서든 얻을 수 있지만, 이 문화콘텐츠를 직접 경험한 '사람'을 통해서 나온 정보는 다를 거에요. 악씨레터 전체가 이러한 성격을 띄고 있긴 한데요. 악씨레터's Pick에서 좀더 다양하게 소개해 드릴게요. 2주에 한 번씩 찾아올 예정입니다.
오늘의 악씨레터에서는 슈퍼히어로물에 관한 강력한 인사이트가 있었구요. 오페라의 유령이 다시 공연되기를 애타게 기다리게 되었어요.(믿고 보는 오페라의 유령입니다!) 한 주간 건강하게 보내시고,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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