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대통령궁 입구에는 엄청난 근육질을 자랑하는 두 개의 석상이 있습니다. 한쪽에는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무릎으로 누른 채 목에다 칼을 겨누었고, 다른 한쪽은 몽둥이로 내려치려고 합니다. 석상을 보면서 체코인들의 힘과 기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언뜻 드는 생각으론 위에서 누르는 사람은 체코인, 아래서 겁을 먹은 사람은 주변 약소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론 달랐습니다. 해당 조각상은 과거 오스트리아의 함스부르크 가문이 체코를 지배할 당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만든 조각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누르는 사람은 오스트리아인, 아래 굴욕당한 사람은 체코인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우리로 치면,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동상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굴욕적인 역사의 잔재라 당장 없앨 법도 한데, 이 석상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합니다. 그것도 한 나라 권력의 심장부 격인 대통령궁 입구 앞에서 말이죠.
사실 독립 이후, 당시 국민들은 동상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철학자 출신 초대 대통령 마사릭이 시민들을 설득해서 동상을 그대로 놔두게 했습니다. 동상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잊지 말자는 의도에서 한 조치입니다. 지금도 체코의 학생들은 이곳에서 조국의 아픈 역사를 배운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통찰도 대단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인 국민들의 의식 수준도 참 놀랍게 느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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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체주의로부터 민주화를 일궈낸, 이례적인 사례를 남긴 국가입니다. 우리가 아는 벨벳혁명이 그것입니다. 그 후 벨벳혁명은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화를 이룬 모든 혁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지도자는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인데, 그는 극작가 출신으로 오랫동안 공산 체제에 항거한 ‘지성인’입니다. ‘지성인’라는 단어가 좀 거창하게 들릴 듯싶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성인이라면 고등교육을 받아야 하고, 대학교수 출신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하벨은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류 대학을 졸업한 것도 아니고, 소위 연줄이 있거나, 특정 후견인을 둔 잘나가는 극작가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날마다 자기 삶을 성찰하고,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불의에 저항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하벨은 순식간에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취임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반체제 인사로 구류되어 있었으니,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당시 체코인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았습니다, 철학자 출신 인물이 건국 대통령이 된 것을 보면, 극작가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도 낯선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 프라하는 유럽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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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벨은 대통령이 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 권력의 도구에 의존하는 제도화된 수준에서 체제와 맞붙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전혀 다른 수준, 곧 인간의 의식과 양심의 수준, 실존의 수준에서 대결해야 합니다.” 하벨이 개혁을 이야기하며 중요하게 다룬 가치는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였습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타성에 젖은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거부하는 능동적인 시민의식이 참 개혁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해서 한 말입니다. 체제가 강조되면 진영논리가 생기고, 어느 문제든 편을 갈라서 해석하기 때문에 비판성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그럼 모든 문제를 토론이 아닌, 투쟁으로 해결하려고 들 것입니다. “정의로운 시민은 있지만, 정의로운 국가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은 정의롭게 살 수 있어도 국가는 정의롭게 유지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최대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느 결정을 내리면 다른 한쪽은 희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도화된 체제로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참 위험해 보입니다. 하벨의 말처럼, 바뀌어야 할 대상은 체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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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프라하 #벨벳혁명 #바츨라프하벨 #체제와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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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학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여러 대학에서 영화분석과 글쓰기와 철학과 문화·예술을 가르칩니다. 창작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음반을 제작했고,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서 연구반(48기)을 수료하고 단편영화 제작에도 참여했어요. 이후 영화제와 방송국 음악 경연대회에서 입상을 하였습니다. 현재 한국복지방송에서 화면해설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영상 미디어 스토리텔링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이에요. 저서 <K-스토리텔링>(2022)에 공저로 참여했고, 대표 논문으로 “영화 속 시각이미지에 나타난 ‘사유의 환유적 확장’-영화 <설국열차>를 사례로”(2019)와 “‘봉준호 장르’의 가능성: <기생충>의 크로노토프 서사전략”(2020)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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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기 악씨레터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이번 3기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었는지 갈무리해 볼까요? 미처 읽지 못했던 글, 다시 읽고 싶은 글은 아래의 제목을 클릭해 주세요. 바로 보실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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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부터는 조금 달라진 형식과 새롭게 신설된 코너(?!!) 그리고 새로운 네 분의 필진과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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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Vol.2 No.15에 오타가 있었습니다. ‘히스패닉계는 그들의 교리로 인해 피임과 낙태를 지향하니 출산율은 계속 높아지는 거죠.’ 문장에서 지향을 지양으로 정정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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