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요르단과의 축구 아시안컵 4강전이 끝났습니다. 졸전 끝에 0:2로 우리나라가 한 수 아래라 생각한 요르단에게 패하였죠. 설상가상으로 축구대표팀의 주축 선수인 손흥민 선수와 이강인 선수 사이의 물리적 충돌까지 알려지면서 그 후폭풍은 정말 거셉니다. 이강인 선수에 대한 축구 팬들의 비난에 더해 정치계 인사들의 왈가왈부, 여론은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끌어 올랐습니다. 결국, 축구대표팀 사령탑을 맡고 있던 클린스만 감독은 경질되었고,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시민단체에 의해 경찰에 고발당했죠. 그 여파는 현재진행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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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이라는 말은 이제 매우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팬이라는 용어는 무슨 뜻일까요? 마크 더핏(Mark Duffett)이라는 학자에 따르면, “‘팬’이라는 용어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광신도(fanatic, 열성 신도)’를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고 합니다.(마크 더핏, 김수정·곽현자·김수아·박지영 옮김, 『팬덤 이해하기』, 서울: 한울아카데미, 2016, 24쪽) 종교 영역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팬이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스포츠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야구 관중의 열정을 묘사하기 위해 미국 기자들이 이 말을 사용하면서, 이후 영화나 음반과 같은 대중문화의 열성적인 수용자들도 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팬덤’은 이 팬이라는 말에 영지·나라 등을 뜻하는 접미사 ‘덤(-dom)’이 합성된 말입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뜻이죠.
스포츠 팬과 팬덤은 특정 스포츠 팀이나 선수의 신체/운동 능력에 대한 경외와 존경에서 시작됩니다. 스포츠는 필연적으로 선수 개인 간의 혹은 팀 간의 경쟁을 수반합니다. 누가 더 우월한 신체/운동 능력이 있는지 가려야 하기 때문이죠. 즉, 승자와 패자가 존재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나 팀이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하지만 만약 패배한다면 일이 커지는 경우가 왕왕 생깁니다. 내가 좋아했던 선수나 팀에 대한 실망감이 상대 선수나 팀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확장되는 경우가 자주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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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건(hooligan)’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스포츠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관중이나 팬을 뜻하는 말입니다. 훌리건은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축구팀의 극성 팬’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에 발생한 ‘헤이젤 참사’(유러피언컵 결승전이 열린 벨기에 브뤼셀 헤이젤 경기장에서 영국 리버풀 FC와 이탈리아 유벤투스 훌리건의 충돌로 39명의 사망자와 450여 명의 부상자 발생)는 훌리건의 대표적인 난동 사건이죠. 특정 선수나 팀의 스포츠 팬은 왕왕 경쟁 관계에 있는 선수나 팀의 안티 팬이 됩니다. 비비 테오도로플루(Vivi Theodoropoulou)라는 학자의 풋볼 팬덤의 사례연구에 따르면, 스포츠 팬덤의 안티 팬덤은 경쟁자에 대한 두려움, 경외, 존경, 시기심과 같은 정서적 동기에 의해 생겨나며, 이러한 동기는 경쟁자에 대한 적대감과 경쟁자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감정을 격화시킨다고 합니다.(Theodoropoulou, Vivi, “The Anti-Fan within the Fan: Awe and Envy in Sport Fandom”, Fandom: Identities and Communities in a Mediated World, Gray, J. & Sandvoss C. & Harrington, C. Lee (Eds.), New York and London: New York University, 2007, 325∼326쪽)
여자 피겨 선수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팬 간의 갈등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1990년생 동갑인 두 선수는 한국과 일본의 간판 피겨 선수이자 국민적 아이돌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주니어 선수 시절부터 경쟁을 거듭했습니다. 처음에는 두 선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2009년 피겨 세계선수권대회를 기점으로 김연아 선수가 앞서나가기 시작하더니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압도적인 점수 차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아사다 마오 선수가 은메달을 땄습니다. 그러자 두 선수의 팬덤 간의 갈등이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아사다 마오 선수의 팬들은 김연아 선수가 심판 매수를 했다고 음모론을 제기하더니 급기야 김연아 선수가 경기에 하고 나온, 당시 김연아 선수가 광고모델을 하고 있던 J사의 귀걸이를 문제 삼았습니다. 올림픽 규정에는 올림픽후원사의 제품이 아닌 선수 개인이 광고하는 회사의 제품을 선수가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규정을 어기면 메달을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 단, 올림픽위원회에 사전에 등록하고 승인을 받는다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김연아 선수는 절차대로 사전 등록과 승인을 받은 후 착용하여 문제의 소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아사다 마오 선수의 팬들이 이를 문제 시 하면서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연아 선수의 팬들이 반격에 나섭니다. 아사다 마오 선수가 사용했던 티슈가 올림픽후원사의 제품이 아닌 선수 개인이 광고모델을 하고 있던 회사의 제품인 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심지어 올림픽위원회에 사전 등록과 승인을 받지 않아, 김연아 선수의 팬들은 오히려 아사다 마오 선수의 은메달이 박탈당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아사다 마오 팬들의 김연아 선수 금메달 박탈 주장은 사그라들었습니다.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 팬덤의 갈등은 스포츠 팬과 안티 팬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을 둘러싼 역사적·정치적 갈등, 언론의 라이벌 구도 만들기도 두 선수의 팬덤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데 한몫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인이 제일 싫어하는 한국인으로 김연아 선수가 꼽힌 적도 있었죠.
그런데 스포츠 팬과 안티 팬이 되는 과정은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나 팀이 서로 비등한 실력일 경우에 형성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존재한다면 적대감보다는 경외심이 더 발동하죠. 한국과 일본의 남자 피겨 간판선수인 차준환과 하뉴 유즈루 팬들이 좋은 예입니다. 물론 두 선수의 나이 차가 있어 활동 시기가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처럼 완전히 겹치지는 않았지만, 상당 기간 선수 활동을 같은 시기에 했습니다. 하지만 차준환 선수가 시니어에 데뷔할 당시 하뉴 유즈루 선수는 이미 소치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고 명실상부 남자 피겨 세계 탑인 선수였습니다. 실력 차가 존재하는 데다 두 선수가 같은 코치 아래서 훈련을 받아 친분이 있어 두 선수의 팬들은 서로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는 하뉴 유즈루 선수의 팬들이 많고 일본에도 차준환 선수의 팬들이 상당합니다.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의 사례와는 판이한 양상을 보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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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스포츠의 팀이나 선수의 신체/운동 능력에 대한 경외와 존경에서 시작되는 스포츠 팬과 팬덤은 스포츠 ‘영웅’에 대한 대중들의 ‘추앙’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영웅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죠. 그런데 올림픽과 같은 국가 간 경기는 스포츠 팬과 팬덤을 ‘애국주의’의 선봉으로 변모시킵니다. 각종 스포츠 종목에서 자주 회자되는 한일전이 대표적인 사례들이죠. 이번 카타르 아시안컵 대회가 시작되기 전 한국과 일본 축구 팬들 사이의 주요 이슈 중 하나도 바로 이 한일전의 성사 여부였습니다. 16강전부터 시작되는 토너먼트에서 높은 확률로 한일전이 성사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이 8강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성사되지는 못했죠. 한일전에는 역사적인 경기들이 참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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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처음 개최된 남자 야구 WBSC(World Baseball Softball Confederation, 세계 야구 소프트볼 연맹) ‘프리미어12’ 대회의 ‘오열사’를 아시나요? 당시 일본과 대만에서 열린 이 대회는 개최국 중 하나인 일본이 우승을 노리던 대회였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이하 오타니) 선수는 야구에서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투수와 타자를 성공적으로 겸업하면서 야구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선수입니다. 최고 구속이 165km/h를 기록할 정도로 빠른 볼을 던지는 오타니 선수가 2015 ‘프리미어12’의 주축 선수로 참가했죠. 한국 야구대표팀의 타자들은 예선개막전 한일전에서 투수 오타니의 빠른 볼에 속수무책으로 고전하며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다시 한일전이 성사되었지만 역시 오타니 선수의 빠른 볼에 7회까지 한국 타자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8회 초에 선발투수였던 오타니 선수가 내려가고 노리모토 다카시 선수가 그 뒤를 이으면서 한국은 ‘약속의 8회’(한국 야구계에서 많이 쓰이는 말로 8회에 역전에 성공할 때 쓰임)를 노렸습니다. 그러나 당시 5-7번 타순이었던 선수들이 삼자범퇴를 당하면서 패색이 짙어졌습니다. 8회 말 일본의 공격이 끝난 상황에서 0:3으로 뒤지고 있던 한국대표팀은 9회 초 공격에서 3점 이상을 득점하지 못하면 일본에 또다시 패배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8번 타순에 대타로 오재원 선수가 등판해서 ‘기적의 9회’를 연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무려 세 타자 연속 안타와 여섯 타자 연속 출루로 4득점을 하며 일본에 역전했고, 타순은 한 바퀴 돌아 투아웃 만루 상황에서 ‘기적의 9회’ 시발점이 된 오재원 선수가 다시 등판해 일본 야구 팬들을 충격에 빠트린 일명 ‘빠던’(야구에서 타자가 공을 타격한 후 방망이를 던지는 행위를 배트 플립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빠따 던지기’의 줄임말인 빠던이라고 부름)을 시전했습니다. 홈런성 타구가 비록 일본의 호수비로 아웃이 되었지만 9회 말 일본의 공격을 잘 막아내며 4:3으로 한국이 승리하자 한국 야구 팬들은 오재원 선수를 ‘오열사’라고 불렀고 이 경기는 ‘2015 프리미어12 도쿄 대첩’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한국 야구 팬들은 만약 오재원 선수가 홈런을 쳤다면 애국가의 한 장면이 됐을 거라고 회자합니다. 실제로 유튜브에 ‘프리미어12 한일전 오재원 빠던 ft 애국가’라는 영상이 있을 정도죠.
많은 스포츠 선수가 한일전만큼은 꼭 이기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포츠 팬들도 형편없는 경기력으로 다른 경기를 다 져도 한일전만 이기면 용서가 된다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특히, 개인 종목보다는 팀 종목의 경우가 더욱 그러합니다. 그 대표적인 종목이 축구와 야구입니다. 그래서 ‘영웅주의’에서 ‘애국주의’로의 변모가 가장 쉽게 일어나는 국가 간 스포츠 종목 또한 이 두 종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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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역동적이고, 인기 있는 스포츠 선수나 팀에는 팬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스포츠는 쉽게 팬들을 흥분시키고 감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축구 아시안컵 4강전 패배 여파로 시끌시끌하던 2월 14일, 미국 중부 미주리주 캔자스시티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2월 11일, ‘슈퍼볼’로 불리는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에서 ‘캔자스시티 치프스’가 우승한 것을 기념해서 우승 퍼레이드가 열렸는데 여기서 총기 난사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고로 1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총기 난사 사고는 우승 퍼레이드 참가자 사이의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스포츠 ‘축제’가 그야말로 ‘제물’을 바치는 비극적 ‘제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경쟁 관계에 있는 국가 간 스포츠 팬들의 충돌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올림픽은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스포츠 축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큰 제전이 아닐까 합니다. 올림픽은 간혹 엉뚱한 제물이 희생양이 되기도 합니다.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 중 K-POP 아이돌들을 둘러싼 몇몇 논란이 바로 그러하죠. 스포츠 대회를 제전이 아닌 축제로서만 즐길 순 없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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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팬덤 #스포츠팬 #안티팬 #영웅주의 #애국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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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한국외대 대만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 진정한 ‘아카 팬(aca-fan)’을 지향하며 중국영화, 중국 대중문화, 한류, 팬덤 문화를 공부하고 있어요. 다양한 ‘빠순이’ 경험을 거쳤고, 앞으로도 거칠 예정이며, 이를 연구에 잘 녹여내는 것이 목표예요. 최근에는 플랫폼과 팬덤 연구에 집중하고 있어요. 한국외대 대만연구센터 책임연구원 겸 편집위원, 한국중국언어문화연구회 편집이사, 중국문화연구학회 학술이사, 중국영화포럼 사무팀장,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출판팀장,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재무이사 등을 맡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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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에서 마시는 맥주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친구 따라 처음 야구장에 간 게 대학생 때였어요.🍺⚾ 9회 말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 일어서서 나가는 것에 어리둥절해 하며 12회가 끝이 아니냐고 묻던 ‘야알못’의 저였답니다. 오랜 세월 야구의 매력을 알지 못했죠. 지금은요? 야구장에서 먹는 치맥이 가장 맛있고, 우리 팀 선수들의 응원가는 당연히 외워서 목청껏! 자기 전 남편과 함께 그날의 야구 경기 하이라이트를 챙겨보는 게 일상의 즐거움인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라는 야구 선수 요기 베라의 명언처럼 9회 말 짜릿한 역전의 매력을 아는 찐 야구 팬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정 있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스포츠 팬덤은 강렬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포츠에 매료되어 계신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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