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의 인기는 이소룡의 인기를 바탕으로 <소권괴초>, <사제출마>, <용소야> 등 성룡 특유의 코믹액션으로 계속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는 이소룡 아류 영화 대신에 성룡의 <취권>류의 영화가 만들어져 <애권>, <소애권> 등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성룡의 영화는 <쾌찬차>, <복성고조>의 히트로 현대화되었다. 이 영화의 감독인 홍금보도 인기 정상에 올랐는데 <귀타귀>로 강시영화가 인기를 끌게 된다. 이어 임정영의 <강시도사> 시리즈가 나오며 중국귀신이 한국의 극장가를 휩쓸었다.
그런가 하면 허관걸, 허관문 형제의 <미스터 부> 시리즈가 개봉되었지만 홍콩에서처럼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이것은 웃음을 받아들이는 양국 문화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미스터 부> 1부가 <반근팔냥>이고 2부가 <귀마쌍성>이었다. 이소룡 영화를 패러디해 포복절도시키는 이 영화들의 인기는 홍콩인들을 매료시켰다. 이런 흐름은 주성치로까지 이어진다.
80년대 초 한국은 성룡과 허관문, 홍금보의 대결장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연걸이 <소림사>로 데뷔해 꾸준히 활동한다.
1986년, 서대문의 화양극장에서 개봉된 한 편의 느와르 영화 <영웅본색>이 홍콩 느와르 영화의 불씨가 되었다. 주윤발, 장국영, 적룡은 바바리코트와 의리를 앞세우며 한국에 강호 붐을 일으킨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영웅무언> 등이 개봉되는데 일본판 암흑영화류에 홍콩식 액션을 가미한 이런 영화가 홍콩 느와르라는 이름으로 큰 인기를 끈다.
성룡의 영화도 꾸준히 만들어져 <프로젝트A>, <폴리스 스토리>, <용형호제>가 성룡의 인기를 확인시키며 성룡 영화는 설날과 추석 TV프로그램으로 매번 상영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홍콩 느와르의 틈새에 <도신>, <도성> 등의 도박영화가 개봉되며 주윤발 외에 주성치라는 배우가 홍콩영화 애호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는 1992년 <심사관>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더니 <희극지왕>, <당백호점추향>으로 홍콩 남배우 중 인기 상종가를 기록한다.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대중적인 인기보다는 소수이지만 열광적인 팬들의 지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정소동 감독은 <천녀유혼>으로 왕조현 신드롬을 일으킨다. 홍콩의 가수왕인 알란탐(담영린)의 영화 <경천12시>도 개봉되었으나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오우삼은 <첩혈가두>, <첩혈쌍웅>으로 꾸준히 느와르 영화를 만들다가 할리우드로 진출해 <페이스오프>, <미션임파서블 2>를 연출한다.
성룡도 끊임없이 신작을 선보였는데 1995년 구정에 개봉된 <홍번구>와 그 후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등으로 꾸준히 인기를 끌었고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 속에서도 유덕화는 굳세게 자리를 지켰다. 왕가위의 <중경삼림> 등도 그의 열혈 팬들을 열광시켰는데 주성치는 <소림축구>, <쿵후허슬>로 그의 인기를 재확인시켰다. 그런가 하면 <무간도> 등의 새로운 느와르로 홍콩영화의 재기를 보여주었다.
그 후에 홍콩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대형사극이다. 장예모가 만든 <연인>, <영웅>, <야연> 등에 이어 <삼국지>, <적벽대전> 등은 분명한 목적을 지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영화들이다.
홍콩영화는 한국에서 홍콩 내에서와는 다른 흥행을 기록했지만 흥행의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관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것은 유사한 양국의 문화나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교류와도 무관하지 않은 결과이다.
홍콩영화의 붐이 한풀 꺾인 근래 들어 한국영화가 홍콩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