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야구를 가장 많이 본다. 시간이 맞으면 K리그도 보고, 농구와 여자배구도 챙겨본다. NBA도 보고, EPL과 라리가, 분데스리가도 틈틈이 본다. 특별히 한 종목만을 열성적으로 좇는다기보다, 그날 재미있는 경기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채널을 돌려보는 쪽에 가깝다.
어렸을 적 겨울방학이면 낮시간에 중계되던 NBA를 틀어놓곤 했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기 시작한 뒤에는 새벽마다 잠을 줄여가며 프리미어리그를 봤다. 그렇게 맨유를 좋아하게 되었고,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뛰기 시작하면서 또 자연스럽게 토트넘 경기를 찾아봤다. 선수 하나가 새로운 리그로 향하면 나 역시 그 선수를 따라 낯선 팀과 리그를 알아갔다.
스포츠 팬이 되는 과정은 대체로 그렇게 우연했다. 먼저 경기를 보고, 그 안에서 좋아하는 선수와 팀을 발견하고, 어느 순간 팬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다.
보고 싶은 경기가 몇 시에 열리는지를 알아보기 전에 그 경기를 어디에서 중계하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어느 플랫폼에 가입해야 하는지, 별도의 이용권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부터 찾아본다. 야구를 보고, 축구를 보고, 농구를 보고, 해외 스포츠까지 두루 즐기려면 여러 플랫폼과 채널을 오가는 일 자체가 하나의 일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 경기를 돈을 내면서까지 봐야 할 정도로 이 선수를 좋아했던가?
굳이 생중계를 볼 필요가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유튜브에 올라오는 2분짜리 하이라이트를 보면 되는 것 아닐까.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스포츠와 선수에 대한 마음이 월 구독료 앞에서 갑자기 계산의 대상이 된다.
예전에는 경기를 얼마나 자주 보고, 얼마나 오래 응원했는지가 팬심의 흔적이었다면, 지금은 때때로 결제 버튼을 누르는 일이 팬임을 증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식처럼 느껴진다. 보고 싶으면 결제하면 되고, 결제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보기 위해 플랫폼에 가입한다. 그리고 결제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경기가 열린다.
조금 이상하다. 팬이어서 돈을 내는 것인지, 돈을 내야 팬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이 지점에서 스포츠 팬은 묘한 질문과 마주한다.
나는 얼마짜리 팬인가.
스포츠에 돈이 들어가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경기장에 가기 위해 티켓을 사고,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사고, 머플러와 응원도구를 사는 일은 오래전부터 스포츠 문화의 일부였다. 중계권 역시 과거부터 거대한 시장이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부터 방송사들은 월드컵과 올림픽, 해외 프로스포츠의 중계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해 왔다.
다만 팬이 비용을 체감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과거 방송사는 중계권을 구매한 뒤 광고나 채널 수익을 통해 상당 부분을 회수했다. 팬은 이미 가지고 있던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며 경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계권료가 상승하고 스포츠 전문채널과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경기를 ‘보는 행위’ 자체가 점차 독립된 상품이 되었다.
2018년 한 보도는 당시 SPOTV의 해외축구 유료 중계를 다루며, 과거 무료 혹은 케이블 가입만으로 보던 경기를 별도의 가입비와 시청료를 내고 보게 된 상황을 지적했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유료 중계는 한국 스포츠 시청문화에서 새로운 변화로 받아들여졌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 복잡하다. 스포츠는 OTT와 플랫폼이 이용자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핵심 콘텐츠가 되었다. 중계권은 점점 비싸지고, 인기 있는 종목과 리그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도 거세졌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중계권을 둘러싼 갈등은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JTBC가 약 1,840억 원에 월드컵 중계권을 확보한 뒤 이를 지상파에 재판매하는 과정에서 가격을 둘러싼 협상이 이어졌다. KBS는 공동중계를 결정했지만 MBC와 SBS와의 협상은 가격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됐다. 월드컵처럼 국민적 관심이 높은 경기조차 결국 거대한 중계권 시장 위에서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일부 스포츠 행사에는 ‘보편적 시청권’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존재한다. 국민적 관심이 높은 경기를 가능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대부분의 스포츠는 이 범위 밖에 있다. 프로야구, 프로농구, 프로배구, K리그, EPL이나 NBA와 같은 경기를 매주 볼 수 있는가는 기본적으로 시장의 영역에 놓여 있다.
그렇다고 모든 스포츠 중계를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계권 판매는 리그와 구단의 중요한 수익원이다. 더 많은 자본이 스포츠에 유입되면 선수와 경기의 질이 높아질 수 있고, 더 좋은 제작환경과 중계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스포츠가 하나의 산업인 이상 그 경제적 가치를 부정할 이유도 없다.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역설이 있다. 팬의 관심이 스포츠의 가치를 높였는데, 높아진 스포츠의 가치는 다시 팬에게 비용을 요구한다. 관중이 없고 시청자가 없다면 막대한 중계권료도 존재하기 어렵다. 팬은 스포츠 산업의 소비자이지만 동시에 그 산업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경기장을 찾고, 중계를 보고, 선수를 이야기하고, 승패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스포츠는 거대한 콘텐츠 산업이 된다.
그런데 스포츠의 가치가 커질수록 팬이 스포츠에 접근하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도 함께 높아진다면 우리는 한 번쯤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스포츠 산업의 성장은 과연 팬의 경험도 함께 풍부하게 만들고 있는가.
스포츠를 보는 풍경도 달라졌다. 누군가의 집이나 호프집에 모여 치킨과 맥주를 앞에 놓고 같은 화면을 바라보며 골 하나에 함께 소리를 지르던 프리미어리그가 있었다. 다음 날이면 직장이나 학교에서 “어제 봤어?”라는 한마디로 전날의 경기를 다시 복기하곤 했다.
물론 지금도 함께 경기를 본다. 단체 채팅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경기 하나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반응한다. 연결되는 방법은 오히려 더 많아졌다.
그런데 가끔은 묘한 장면도 생긴다. 나는 컴퓨터 앞에 혼자 앉아 내가 결제한 플랫폼에 접속한다.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경기를 본다. 골이 들어가면 혼자 탄성을 내고, 경기가 끝나면 창을 닫는다. 같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은데, 그 경기에 들어가는 문은 점점 개인의 계정과 결제창으로 나뉘어 간다.
스포츠가 가진 매력 가운데 하나는 함께 본다는 데 있었다.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사람과도 같은 팀의 골에 환호하고, 같은 패배에 허탈해질 수 있었다. 경기장에서는 옆자리의 낯선 사람이 순간적으로 동료가 되었고, 텔레비전 중계는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같은 시간으로 불러 모았다. 플랫폼 시대에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공동의 시간에 들어가기 위해 각자가 먼저 자신의 입장권을 구매해야 하는 순간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여러 종목을 두루 즐기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특정 팀의 경기를 모두 챙겨보는 열성팬이라면 해당 플랫폼에 기꺼이 가입할 수 있다. 그러나 야구를 주로 보면서 가끔 농구도 보고, 재미있는 K리그 경기가 있으면 틀어보고, NBA 플레이오프와 유럽축구도 즐기는 사람은 매번 선택해야 한다.
이 스포츠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는가.
한 달 이용료를 낼 만큼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냥 결과만 확인해도 되는가.
플랫폼은 우리에게 스포츠를 선택하게 만들 뿐 아니라 때때로 자신의 팬심에 가격을 매기게 만든다. 그 결과 좋아하는 종목이 많다는 것은 즐거움인 동시에 지출 항목이 늘어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야구를 보고 싶어서 하나, 해외축구를 보고 싶어서 하나, 다른 스포츠를 보고 싶어서 또 하나. 스포츠에 대한 호기심이 넓어질수록 결제 목록도 함께 길어진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좋아하는 스포츠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돈을 내면서까지 볼 스포츠’를 추리기 시작한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이미 팬이 된 사람보다 아직 팬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는 어린 시절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NBA를 봤다. 박지성의 경기를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프리미어리그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우연히 접한 경기가 또 다른 경기를 보게 만들었고, 새로운 선수와 팀을 알게 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돈을 내면서까지 보고 싶은 스포츠는 많지 않았다. 봤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것이다.
스포츠 중계는 기존 팬에게 경기를 전달하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 아직 관심이 없던 사람을 새로운 팬으로 만드는 입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포츠가 각각의 유료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고 그 입구가 좁아질수록 이러한 ‘우연한 만남’의 가능성도 줄어든다. 이미 좋아하는 사람은 비용을 내고 들어가지만, 아직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애초에 그 경기와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상업성이 낮은 종목이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중계 노출이 줄어들면 새로운 팬이 유입되기 어렵고, 팬이 줄면 다시 상업성이 낮아진다. 결국 시장에서 가치가 높은 스포츠는 더 많이 노출되고, 그렇지 못한 스포츠는 점점 보이지 않는 악순환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스포츠 중계권의 문제는 단순히 ‘무료냐 유료냐’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스포츠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팬이 스포츠와 만날 수 있는 문화적 통로 역시 함께 넓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니폼과 굿즈를 사는 것은 팬임을 표현하는 소비였다. 유니폼을 사지 않는다고 해서 경기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머플러가 없다고 응원할 자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중계 구독은 조금 다르다. 결제하지 않으면 그 경기 자체를 볼 수 없다. 팬이기 때문에 소비하는 것을 넘어, 소비해야만 팬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경기 보기’에 접근할 수 있는 순간이 늘어나고 있다.
오늘도 보고 싶은 경기를 검색한다. 경기 시간보다 중계 플랫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결제창 앞에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 정도 돈을 낼 만큼 나는 이 팀의 팬인가.
이 선수의 경기를 꼭 생중계로 봐야 하는가.
그냥 내일 아침 2분짜리 하이라이트를 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리고 결국 결제 버튼을 누른다. 나는 또 하나의 플랫폼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내가 팬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예전에는 좋아하는 팀이 골을 넣으면 옆 사람과 소리를 질렀다. 지금은 혼자 있는 방에서 작은 화면을 바라보다 조용히 주먹을 쥔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 많은 스포츠를 알고 더 쉽게 경기 정보를 접하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스포츠 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해지고 있는데, 우리는 정말 스포츠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일까.
스포츠를 좋아하는 마음까지 구독해야 하는 시대라면, 나는 과연 얼마짜리 팬이어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