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No.12 II 2026.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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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영 작가의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최근에 본 드라마 가운데 가장 큰 위로를 준 작품입니다. 이 드라마는 20년째 데뷔를 못해서 질투에 가득 찬 황동만이라는 영화감독 준비생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입니다.
황동만(구교환)은 자신을 둘러싼 선배, 동료, 후배로 이루어진 8인회의 구성원이 모두 영화감독이나 영화제작자로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이도저도 아닌 채 지망생으로 남겨진 인물입니다. 자신만이 홀로 데뷔하지 못하고 남겨진 상황에 고립감을 느껴요. 아울러 타오르는 질투와 함께 극심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의 좌절감과 분노는 기성 감독의 작품은 물론이고 동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이어지는데요. 사실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열등감과 분노, 불안을 감내하며 살고 있어요. 그의 존재 방식은 그의 형 황진만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집안일을 하고, 자꾸 자살 시도를 하는 형을 돌보면서 낡고 허름한 아파트 베란다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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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포스터 ⓒJTBC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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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만의 어수선한 심리상태와 책과 원고, 잡동사니로 가득한 작은 서재는 어쩐지 나 자신과 동일시됩니다. 뭐 그리 대단한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글을 쓰는 것도 아닌데 머리가 항상 복잡하고, 논문을 쓰느라 한껏 어지럽혀진 나의 책상과 서재! 글을 매개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나 역시 그의 처지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동만의 형 황진만(박해준)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국어국문학 박사이자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은 시인이지만 강단에 서고자 했던 꿈이 좌절되면서 이혼을 겪고, 딸아이마저 잃은 채(드라마 후반부에 딸이 입양된 사실을 알게 됨)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는 인물이에요. 그런 그는 매일 끼니마다 술로 세월을 달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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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중 술주정뱅이의 별 ⓒ어린 왕자/열린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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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어린 왕자는 여행 중 한 별에서 술주정뱅이를 만나게 됩니다. 술주정뱅이는 술 마시는 것이 부끄러워 그 사실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말합니다. 진만의 밥상에도 항상 술병이 놓여 있어요.
진만은 10년째 시를 쓰지 않고 용접공으로 살고 있으며, 언제든 죽을 기회를 잡고자 하는 사람처럼 허무한 자살 시도를 반복합니다. 누군가 그에게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시를 쓰는 것이 고통스럽고, 이제 시를 쓰지 않고 용접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좋다고 대답합니다. 용접을 하는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런 고통도 없다는 것이지요.
진만의 독백이나 대사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시 같아서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어요. 20년째 미운 오리 새끼였던 동만이 공모전 수상자로 선정되어, 드디어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앞두고 들떠있는 장면에서 진만이 동만에게 해준 말은 한 편의 시 같기도 하여 공유하고 싶어서 적어봅니다. 동만은 영화 제작을 앞두고 고사를 지내는 장면에서 진만의 말을 회상합니다. 대사를 정확하게 받아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략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목을 달아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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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아우성
황진만
모든 스토리는 나는 존재한다는 아우성
이렇게 아프게 존재해
이렇게 슬프게 존재해
이렇게 우울하게 존재해
이렇게 웃기게 존재해
기껏해야 백 년
백 년이면 다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것이 진정 존재했던 건가
그런 의문을 잠재우기 위해
정신없이 스토리를 써대지
살아있는 한
스토리를 써야 한다면
이왕이면 웃기게
난 그렇게 못살았지만
넌 웃기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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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존재의 아우성으로 나의 스토리를 써나가야 한다면 이왕이면 웃으면서,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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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존재의 아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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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은 석
2012년에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콘텐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한국외대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있으며, 에코뮤지엄의 국내 수용과 무형유산의 문화콘텐츠화, 커뮤니티 디자인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서는 『에코뮤지엄: 지속가능한 농촌 희망 프로젝트』, 『신박물관학 시대의 큐레이터』, 『Ecomuseums and cultural landscapes』(공저), 『문화농촌・창조농촌: 농촌의 가치와 문화전략』(공저), 『근대 한식의 풍경』(공저), 『프랑스의 지역문화콘텐츠』(공저)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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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화 마지막쯤 동만이 뛰면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땐,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 그러다 길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넘어지죠. 마지막 장면에 보여진 ‘당신의 현재 속도는 22km/h’. 동만의 인생의 속도를 말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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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상에 ‘짜친다’는 말이 있어요. 별로이다, 없어 보인다, 유치하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요. 동만의 행동은 참 짜치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게 뭐 어때서?’라고 되묻는 것 같아요. 좀 그러면 안 되나 싶은 거죠. 그 누구에게도 인정 받지 못한 순간, 동네가 떠나가라 “동만아~ 황동만~” 스스로를 부르는 모습은 뭉클한 존재의 아우성이었어요.
얼마 전 디비피아 인스타그램에서 박사과정생 절반 이상이 임포스터 증후군(Impostor phenomenon)에 시달린다는 글을 봤어요. 자신을 실력 있는 사람들 사이에 운으로 들어온 사기꾼이라 여기며, 스스로의 능력을 끊임없이 낮게 평가하는 거예요.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까봐 논문 제출을 미루고, 발표를 피하고, 도움 요청도 못 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거죠.(내 얘기인데? 싶었습니다.😨) 박사과정생이 스스로를 부족하게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우리는 다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이잖아요. 어쩌면 우리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나의 존재를 외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구독자님도!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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