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씨 뉴스레터 Vol.1 No.12 2023.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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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제주도 어느 도서관 공연장에서 뮤지컬을 하고 왔습니다. 까마득한 옛적에 참여했던 공연이었는데, 이번 제주도 ‘특공’(특별 공연)에 특별하게 투입되어 무대에 섰습니다. 말이 특별하게지 사실은 땜빵이었어요. 기존 배우가 스케줄이 맞지 않아서 긴급하게 투입된 것이었죠. 안 그래도 할 일이 태산 같은 제 입장에선 할 이유가 없었지만, 간곡하게 요청하는 연출의 부탁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누굴 탓하겠습니까, 거절 못하는 제 성정을 탓해야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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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어른동생>은 제가 2017년 초연에 참여하고, 2018년 삼연까지 1년 반 정도를 함께한 공연이었어요. 그리고 2019년 연변에서 잠깐 공연될 때 특별 출연을 하고는 완전히 작별한 작품입니다. 저는 본래 권태로운 성격을 지닌데다가 평소 “박수칠 때 떠나자”라는 신념을 품고 있는지라, 한 공연을 오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연변에서 맞이한 작별의 순간에도 정말이지 미련 없이 시원한 마음으로 떠나보낼 수 있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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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에게 <어른동생>을 다시 하라는 제안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죠. 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대장정의 마무리를 지은 작품을 다시 하는 것, 그것도 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마치 고3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수능을 준비하는 기분이랄까? 혹은 헤어진 애인과 만나서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랄까? 그 어떤 비극적 상황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분명 괴로운 일임에는 틀림없지요.
뭣 모르는 사람들은 이미 했던 작품인데 뭘 그리 엄살부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에 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어요. 과거 정점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 찬란했던 모습과의 싸움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사를 철저하게 외운들, 노래와 안무를 완벽하게 구사한들 그때보다 잘 할 수는 없어요. 세월은 노련함을 더해주지만, 신선함에서 멀어지게 만들죠. 창작의 세계에서 절대 노련함은 신선함을 이길 수 없어요. 했던 공연을 다시 한다는 것, 나의 몹쓸 변화를 체감하게 하는 비참한 게임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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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무대에 서는 것
고사 끝에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 것은 이 작품의 연출님 때문이었어요. <어른동생> 이전에도 <형제의 밤>이란 연극을 함께 했던 사람인데, 우린 꽤 단단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요. 저는 이 연출에게 감사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형제의 밤>을 할 땐데, 제가 속한 페어가 준비가 덜 된 상태였는데도 저를 믿고 무대에 세워줬던 일이에요.
사실 연출은 우리 페어의 부족함에 첫 공연을 미루고 싶어 했지만, 전 관객을 만나면 달라질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강행하기를 원했어요. 연출이 저를 설득하려고 만난 자리에서 도리어 저에게 설득 당했고, 결과적으로 무대에 올라 반전의 결과를 만들어냈죠. 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 다행스러우면서도, 어린 배우의 근자감을 믿고 기회를 준 연출님의 강단에 깊이 감동했어요. 저는 생맥주를 함께 마시며 그 대단한 결정을 했던 그날의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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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어른동생>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저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준비했다는 것이었죠. <형제의 밤>을 하던 틈틈이 연출은 <어른동생> 이야기를 해주었고, 저를 생각하며 대본을 쓰고 결국 캐스팅까지 해주었어요. 오디션 없이 작품에 내정되는 경험을 안겨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저는 성심으로 작품을 준비했고 신명나게 연기했습니다. 이 귀한 주말에, 쉼을 포기하고 제주행을 택한 것은 모두 연출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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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공연에 오르는 길은 참 험난했습니다. 저는 체질적으로나 풍수지리적으로나 제주하고 안 맞습니다. 역시나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장염에, 몸살에, 알레르기까지 삼중고를 겪어냈고, 안간힘을 내어 공연을 마무리했습니다. 공연이란 게 참 재밌는 것이 관객을 만나고 관객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아픔도 괴로움도 눈 녹듯이 사라진다는 것이에요. 무대 위에선 나와 관객, 그리고 감정의 공유만이 자리하여, 모든 것이 비워지고 그 자리에 희열감만 채워진답니다.
무대를 내려와 분장을 다 지우고 나니 비로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더군요. 묵묵히 팀을 이끌어가는 연출님, 담담한 칭찬으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음악감독님, 여전한 유쾌함으로 분위기를 살리는 선배와 연습밖에 모르는 성실한 후배, 창작의 세계를 재미나게 해설해 준 원작 작가님까지 한편의 특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열과 성이 한 곳에 모여들었지요. 어느 한 사람 모난 데 없이, 본받을 점만 그득했습니다.
다시는 제주와 무대로는 발길도 하지 않으리라 맹세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제가 또 언제 이런 재능 있는 사람들의 선한 기운을 마주할 수 있겠어요. 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그렇게 오기 싫었던 제주에서의 정말 하기 싫었던 공연이었지만, 그 속에서 또 배우는 것이 있구나. 얻어 가는 것이 분명히 있구나. 얼마 전까지 굳은 맹세를 했던 마음으로 새로운 의미를 새기게 됐어요.
콘텐츠를 한다는 것, 사람을 얻는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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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한신대학교 디지털영상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한국영화, 장르영화, 스토리텔링, 공연예술, 연기예술, 문화콘텐츠 이론, 정체성 등을 공부하고 있어요. 삶의 미(美)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콘텐츠도, 학문도, 인간 사회도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전형적인 것과 틀에 박힌 사고를 싫어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대상과 관계 맺고 싶어 해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적대하며, 이 세상에 참신하고, 유니크하고, 이상한 것들이 넘쳐날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총무이사,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고, 단편영화 <에스프레소 더블샷> <분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를 각본/연출로 찍었습니다. 언젠가 장편영화로 입봉하여 많은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꿈이에요. 획일화돼 가는 세상에서 나다움을 바로 알고, 나만의 이야기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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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악씨레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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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첫 주, 첫 악씨레터 발행을 시작으로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악씨레터는 구독자님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어떤 레터들이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임대근
구독이냐, 광고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이스카페라테와 잼버리
'콘텐트'와 '콘텐츠' 사이에서
😉오소정
고춧가루와 연어알 사이
이모티콘의 확장 어디까지 이를까
달콤한 일상, 달콤한 변주: 약과와 탕후루, 문화민족주의
😊여구리
마이너 필링스, 내면을 읽는 용기
중국은 왜 잔망루피에 열광할까
한녀와 중국 청년
😎이태리
손석구와 '가짜 연기'
엄태화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텐츠를 한다는 것
이 '레터'라는 형식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글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에요. 악씨레터는 정보를 전달하는 '뉴스'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시각과 인사이트를 드리는 '레터'의 기능에도 충실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바로바로 악씨레터의 치트키!! 다양한 필진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동안 네 분의 필진께서😁😉😊😎 각각 세 편의 레터를 써주셨는데요. 11월부터는 새로운 네 분의 필진께서🧐🤭😌😜 악씨레터를 가득 채워주실 예정입니다.
다음주 수요일 오전 10시, 조금 더 새로워진 모습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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