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씨 뉴스레터 Vol.1 No.11 2023.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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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녀(韓女), 두 개의 얼굴
혹시 ‘한녀’란 말 들어본 적 있으세요? ‘한녀’는 ‘한국 여자’의 줄임말인데, 온라인에서는 주로 한국 여성의 ‘속물성’을 비하하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어요. 한마디로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 노력하지도 않고 돈많은 남자가 모든 걸 다 해주길 바라는 게 ‘한녀’라는 거예요.😮💨
그런데 중국에서는 ‘한녀’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어요. 그들은 명확한 목표의식, 높은 추진력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부지런함과 끈기의 대명사로 추앙받고 있어요. 중국 SNS에서 특히 공시생과 수험생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자주 언급되곤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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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녀에게 묻고 이해하고 본받아라(质疑韩女,理解韩女,成为韩女)
한국의 진정한 무형문화재는 한녀 정신이다(韩国真正的非遗是韩女的精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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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긍정적 이미지가 형성된 데에는 한류 드라마 속 여성 인물의 형상 변화(의존적 이미지→진취적 이미지)도 한 몫 했겠지만, 이른바 ‘공부Vlog’의 유행도 큰 역할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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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영상 플랫폼에서 ‘한녀(韩女)’를 검색하면 UDAN, Bemyself, Bogyung 등 한국 여성 유튜버의 공부Vlog가 쏟아져 나와요. 중국 네티즌들은 이 유튜버들을 ‘미친 언니’(发疯姐), ‘6시 언니’(六点姐), ‘슈퍼 언니’(超人姐)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자신의 ‘언니’를 응원하기 위해 유튜브에 몰려가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주기도 해요.(중국은 VPN를 써야 유튜브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한 팬심이죠!)
이런 공부Vlog는 학습의 강도가 굉장히 높은 게 특징이에요. 예를 들어 ‘매일 18시간 공부하기’ ‘매일 6시 기상’ ‘5시간에 책 1권 완독’ 등이죠. 게다가 화면도 미학적으로 깔끔하고, 공부와 함께 운동과 식단관리로 외모 가꾸기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모범적인 자기관리의 실천자로 평가받고 있어요. 드라마에 등장한 진취적인 여성 인물이 시장의 구미에 맞게 만들어진 허구라면, 공부Vlog는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드라마를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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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녀 컨셉 공부법 (韓女人設學習法)
중국 네티즌들은 이런 Vlog를 보면 자신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면서 공부 능률이 오른다고들 주장해요. 최근에는 한녀Vlog가 콘텐츠를 넘어 일종의 공부법으로 떠오르고 있어요.
사실 그동안 SNS에서 다양하고 기발한 공부법이 인기를 끌었어요. ‘취중 공부법’(약간 취한 상태에서 공부하는 것), ‘공주 공부법’(공무원 시험은 취업이 아니라 국정을 더 잘 다스리기 위한 일이라고 상상하며 공부하는 것), ‘여왕 공부법’(인터넷 강사를 대궐 앞에 꿇어 앉아 업무를 보고하는 신하라고 상상하며 수업 듣는 것) 등이 유행했어요. 스스로 공부하고 싶도록 하기 위해 별의별 상상을 하며 자기최면을 거는 거죠. ‘한녀 컨셉 공부법’도 그 중 하나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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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녀 컨셉 공부법’이란 공부가 안될 때, 깔끔하게 단장하고 도서관에 가서, 10분짜리 한녀Vlog를 시청한 후 바로 공부를 시작하는 방법이에요. 물론 Vlog의 BGM과 비슷한 음악을 들으면서요. 한녀를 롤모델로 삼아 그 역할에 자신을 대입해서, 자신이 곧 한녀라고 상상하며 모방하는 식이에요. 이렇게 하면 공부에 중독된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로 이렇게 해서 시험에 합격했다는 후기와 한녀에게 감사하는 후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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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녀팬과 탕핑족
한녀의 인기 현상 뒤에는 극심한 진학과 취업 스트레스, 그리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과열 경쟁 분위기가 깔려 있어요. 중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네이쥐안(内卷)’이라고 부르죠. 네이쥐안에 대처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은 탕핑족(躺平族)이 되기를 선택했어요. 탕핑족은 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중국 청년들을 일컫는 말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희망이 안보이는 경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접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면 ‘탕핑’은 일시적 일탈 또는 일종의 현실비판적 구호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즉 탕핑을 외치면서도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청년이 더 많다는 얘기예요.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포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죠. 청년들은 과열 경쟁 속에서 쉬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극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서 더 나은 자기 착취를 위한 특효약을 찾아, 바다 건너 한녀Vlog를 구한 것이지요.
그런데 경쟁 이후는요? 탕핑족과 한녀팬, 어느 쪽이 더 현명한 걸까요? 그들은 같은 시공간에 사는 다른 집단일까요? 아니면 다른 시간대에 사는 동일한 집단일까요?
중국 유명 록밴드 ‘만능청년여관(万能青年旅店)’의 대표곡 「그 스쟈좡 사람을 죽여라(殺死那個石家庄人)」가 수많은 동시대 청년들을 울렸다고 해요.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이 이 노래를 '죽지 않는 스쟈좡 사람’으로 바꿨다는 후일담도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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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에 일을 마치고 傍晚6点下班
제약 공장 작업복을 벗었어 换掉药厂的衣裳
아내는 죽을 끓이고 妻子在熬粥
나는 맥주 몇 병 마시러 나섰지 我去喝几瓶啤酒
이렇게 30년을 살아왔어 如此生活30年
저 거대한 빌딩이 무너질 때까지 直到大厦崩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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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세대의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은 어린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미래였죠.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그곳은 아무리 달리고 헤엄쳐도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낭만적인 유토피아가 되고 말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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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녀 #공부Vlog #탕핑족 #청년 #과열경쟁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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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구리
사단법인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특임연구원. ‘조선어’를 배워서 한국을 만났고, 대학원 공부로 삐딱함을 얻었습니다. 제일 자주 하는 생각은 “왜?”이고, 제일 싫어하는 대답은 “원래 그래~”입니다. ‘원래 그런 것’을 인정하라는 말보다 더 폭력적인 말이 있을까요? ‘원래’를 거부하는 게 공부하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회의감이 들 때마다, 어느 겨울날 지하철 2호선에서, 존경하는 분과의 대화를 떠올리곤 합니다. “논문을 열심히 잘 써도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 왜 하는 걸까요?”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워지지 않겠어요?” 공부가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지금은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이 조금씩 그려지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허물고, 자아와 타자의 간격을 좁히고, 편견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향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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