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지역을 떠올릴 때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거긴 뭐가 유명해요?”
마치 지역의 정체성은 오래된 역사와 유산에서만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요즘 지역의 모습은 조금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가보다, 지금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흐름을 우리는 새로운 ‘로컬리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지역의 정체성을 ‘발견’해 왔습니다. 어느 지역에 얼마나 오래된 유산이 있는지, 무엇이 유명한지, 어떤 전통이 전해져 오는지 따져 보곤 했죠. 그런데 이제는 지역의 정체성이 ‘완성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이라는 점이 더 또렷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앞으로의 지역의 정체성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having)’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가느냐(doing)’의 문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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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을 떠올리면 직지사, 김천역, 그리고 자두와 포도 같은 농산물이 먼저 생각나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김천? 김밥 아니에요?”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농담처럼 시작된 이야기가 축제가 되었고, 그 축제는 도시의 새로운 얼굴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김밥은 전통 유산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험이 쌓이자 김천은 김밥을 통해 새롭게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체성은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지면서 생긴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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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김밥축제 홍보 동영상, (우)김밥축제 현장 / 출처: 김천시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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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출범한 세종은 아직 시간이 많이 쌓이지 않은 도시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그려볼 수 있는 ‘백지’ 같은 면모가 있습니다. 그 백지 위에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는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세종이 선택한 방향 가운데 하나는 한글입니다. 한글사랑거리 같은 공간, 공공디자인 속 한글 요소들, 시민 참여 프로그램들이 쌓일수록 도시는 스스로 메시지를 발신하는 매체가 됩니다. 도시는 이제 과거를 보존하는 장소를 넘어, 새로운 기억과 경험을 생산하는 장소로 바뀌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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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한글사랑거리, (상우)한글놀이터
(하좌)한글상점 외부 전경, (하우)한글 상점 내 행사 모습
출처: 세종특별자치시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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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체성은 눈에 보이는 시설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참여와 실천 속에서 자랍니다.
칠곡의 할머니들이 그랬습니다. 연극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글로 쓰고, 작은 무대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평생학습이었지만, 그 실천이 쌓이자, 마을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기억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글은 책이 되었고, 그들의 무대는 마을의 상징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정체성은 시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세종시의 환상형 구조 중앙에 비워진 ‘열린 공간’은 칠곡의 연극 무대와 닮았습니다. 이 거대한 공간을 채우는 힘은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한글을 매개로 소통하고 즐기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경험이어야 합니다. 칠곡의 할머니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도시의 주인이 되었듯, 세종의 시민들이 한글이라는 콘텐츠로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순간, 세종만의 로컬리티도 비로소 또렷해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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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가시나들 거리 / 출처: 칠곡군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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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은 더 이상 ‘무엇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어가느냐’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로컬리티는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라납니다.
오늘 우리 동네에서도 새로운 로컬리티가 시작됩니다. 누군가는 작은 축제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골목에서 모임을 열고, 누군가는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이 작은 움직임들이 쌓일 때 지역은 조용히 달라집니다. 앞으로 우리 지역에서의 로컬리티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작은 움직임이 쌓여, 내일의 지역을 만들고, 마침내 그곳만의 로컬리티를 완성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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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리티 #도시브랜딩 #김밥축제 #세종한글도시 #칠곡할매 #공간의생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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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이자 세종지역학센터장으로, 지역의 일상 공간이 어떻게 이야기가 되고 사람들의 기억을 담는 매체가 되는지 탐구합니다. 문화인류학과 콘텐츠 관점에서 도시와 삶터의 변화를 읽어내며, 지역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서사와 감정의 흐름을 기록하는 연구와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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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김천에서 김밥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읽게 된 기사에서 ‘김밥천국’ 네 글자를 보았을 때 바로 이해하며 무릎을 탁 쳤습니다. 한참 때에는 전국에 600개 이상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었던 ‘김밥천국’은 지금의 4-50대에겐 너무나 익숙한 상호였습니다. ‘김밥천국’은 김밥 한 줄 1,0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과 다양한 메뉴로, 주머니가 넉넉지 않아도 마음 편히 들어갈 수 있었던 따뜻한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김밥은 소풍 날이면 새벽부터 정성껏 싸주시던 엄마의 손맛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기도 하지요. 그런 김밥을 김천에서 지역 축제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저는 무척이나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어떤 로컬리티가 만들어지고 있을까요. 저도 머릿속 가득 여러 가지가 떠오릅니다. 갑자기 우리 동네 자랑을 하고 싶어지네요.😉 구독자님 동네는 어떤가요? 한번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2026년 구정 연휴의 마지막 날입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엔 꼭 해야지 생각했던 일들, 구정 설을 맞아 다시 또 힘차게 시작해 보시지요.💪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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