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F1 더 무비>(2025)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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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일, 영화 <F1 더 무비>가 한국에서 300만 명 흥행 기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더불어 하루 뒤인 4일에는 월드와이드 흥행수익이 5억 4,500만 달러를 돌파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이건 주연배우 브래드 피트가 <월드워Z> 이후 12년 만에 얻게 된 가장 큰 흥행 기록이에요. 아니, 극장가가 고사한다는 이 엄혹한 시국 속에 평범한 ‘스포츠카’도 아닌 ‘F1’ 영화가 무려 300만이라고요?
사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F1이라는 경기 자체가 요즘 쏠쏠한 글로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상황이긴 합니다. 일찍이 2019년부터 F1의 글로벌 인기 상승률은 다른 스포츠들에 비해 괄목할 만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어요. 매년마다 시청자수나 영업이익이 모두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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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스포츠 미디어 채널 성장률 비교 / 출처: F1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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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F1이 이런 전 세계적인 대중적 인기를 일궈내고 있는 건 매우 신기한 일입니다. 일단 F1은 야구나 축구, 농구처럼 일반 시청자가 직접 해볼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닌 데다가, 심지어 과도하게 비싼 경기 입장권 가격 때문에 ‘직관’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스포츠이기 때문이죠.
아니, 그럼 사람들은 직접 타 볼 수도 없고, 경기를 마음대로 보러 갈 수도 없고, 심지어 경기 중계조차 공중파에서 편안히 볼 수도 없는 이 불편한 스포츠를 대체 왜 점점 더 좋아하고 있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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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미디어가 이끈 F1의 ‘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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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 그리고 영화 <F1 더 무비>가 성공적인 글로벌 흥행을 일궈 나가고 있는 이유는, 모두 ‘이야기의 힘’을 아주 영리하게 잘 활용한 F1의 운영진들 덕분입니다.
2017년, 100년 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유러피언 럭셔리 스포츠’ F1의 미래를 바꾼 빅딜이 성사됩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거대 미디어 그룹인 ‘리버티 미디어’가 F1을 9.3조원에 인수한 것입니다. 당시 F1은 2010년대 초반 맞이했던 성장세가 한풀 꺾여나가 매출과 대중적 인기가 정체되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하필) ‘미국’의 ‘미디어 기업’이 인수를 하느냐는 우려도 일부 있었지만, 많은 F1 팬들은 미디어적으로 진취적이고 새로운 마케팅이 이어지지 않을지 내심 기대감을 갖고 이 거래를 지켜보았습니다.
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리버티 미디어는 2019년부터 넷플릭스와 협력해서 F1 역사상 최초의 시즌 다큐멘터리인 <본능의 질주(Drive to Survive)>를 론칭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야말로 초대박의 흥행을 기록합니다. 매 시즌별 5천만 시간 시청기록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간 F1에 접근성이 취약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10~20대, 가족 시청자, 히스패닉 시청자 등등을 F1의 팬덤으로 만들었습니다. 닐슨의 조사에 따르면 F1을 전혀 모르던 사람 36만 명이 <본능의 질주>를 시청한 후 다음 시즌 F1 경기를 챙겨보기 시작했다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홍보 효과가 뒤따라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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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은 매우 한정된 구성원이 치르는 스포츠예요. 전 세계에서 단 10개 경주팀이 일 년 동안 스물네 차례의 자동차 경주를 진행하는 스포츠죠. 한 팀당 차량 두 대와 드라이버 두 명을 기용할 수 있어서, 전 세계의 F1 드라이버는 단 20명에 불과하죠. <본능의 질주>는 여기에 ‘이야기’를 입혀서 보여주었습니다. 2018 F1 시즌을 시작으로, 매 시즌마다 드라이버와 드라이버의 부모, 그리고 경주팀의 관점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본능의 질주>를 보고 시청자들은 스무 명 드라이버 각자의 상황과 사연을 공감하기 시작했고 한 경기, 한 경기 속에 녹아들어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더불어 팀별로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고민과 전략, 갈등, 다른 팀과의 라이벌리(rivaly)와 기싸움 등등 트랙 안팎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살아 숨쉬는 드라마를 <본능의 질주>를 통해 엿보며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라는 건요, 그 자체로 콘텐츠인 동시에 일찌감치 고대 시절부터 사람들 사이에 사용되어 온 매우 유용한 ‘매체’입니다. 문자가 없던 고대에 이야기는 정보를 전달하고 전승하기 위해 발전해 왔죠. 그러면서 이야기는 그것이 향유되어 온 시간만큼이나 깊숙하고 친근하게 사람들의 무의식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통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어 있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거쳐 간 사람들의 일상과 정신, 가치관과 세계관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고 전승시키는 매체로 기능하게 되죠.
일곱 개의 시즌을 거치며 누적된 <본능의 질주> 시리즈 속 70개의 이야기는 F1의 매력과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고, 거기에 빠져들도록 하는 매체로 작용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은 이제 현실의 F1 경기 장면을 보면서 게임의 룰과 방식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거기 등장하는 선수와 감독, 기술자들의 목표와 전략, 상황 등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경기 중에 여러 상황과 변수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선수 및 감독, 기술자들의 즉각적인 감정에 이해하고 몰입하도록 만들어주죠. 이야기의 힘을 빌어, 관중은 경기가 아닌 드라마를 보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F1은 작금의 전 세계적인 대중적 인기를 일궈내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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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능의 질주>가 히트를 기록한 것도 어느덧 7년 전의 일이 됐죠. 이제 <본능의 질주>를 보고 제대로 F1에 감정 이입하기 위해서는 7개 시즌 70개 에피소드라는 방대한 이야기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죠. 리버티 미디어가 태생이 미디어 그룹인지라 이것조차 시청자들의 접근성을 방해하는 장벽이 되었다고 판단한 걸까요? 이제 그들은 더 간단하게 F1의 서사로 ‘뉴비’들을 초청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고민의 결과 F1 75주년 기념사업물로 만든 것이 바로 영화 <F1 더 무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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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진 다큐 서사의 축약버전 - 영화 <F1 더 무비>의 이야기 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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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더 무비>의 서사 구조 자체는 진부하리만치 전형적입니다. ‘상처 많은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팀을 이끌어낸다’는 류의 스포츠-영웅서사 문법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참 영악스러운 점은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라는 가상 캐릭터에 감정 이입해서 극의 흐름을 뒤따라가는 관객들에게 F1이라는 스포츠의 로망을 한껏 안겨준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현실의 F1 경기를 실제로 만들어 나가고 있는 드라이버와 감독, 기술자, 그리고 여러 유명한 트랙을 교묘하게 섞어 보여주면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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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F1에 대해 갖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을 뭐가 있을까요? 아마 속도, 기술, 전략, 추월, 충돌, 파괴(사고) 등등일 겁니다. 이 영화에는 이 모든 이미지가 한 번 이상씩 골고루 등장합니다. 물론 영화는 인과관계로 재현된 현실이기에 <F1 더 무비>에 등장하는 모든 ‘역동적인 장면’들은 실제 F1의 역사 속 사건들을 최대한 그러모아 그럴듯하게 이어 붙여 완성됩니다.
가령 ‘사고’를 볼까요? 소니 헤이즈가 겪은 90년대의 끔찍했던 사고 경험은 마틴 도넬리의 1990년 스페인 그랑프리 예선 사고를 직접적인 모티프로 삼았고, 몬자에서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가 당하는 사고는 2019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F3 레이스 중 일어났던 알렉산더 페로니의 사고와 2022년 실버스톤 그랑프리에서 일어난 저우관유의 사고를 오마주합니다. 그리고 피어스가 이 사고로 손등에 화상을 입는 것은 2020년 사키르 그랑프리에서 있었던 로맹 그로장의 사고를 인용한 것이죠. 또, 사고 현장으로 뛰어가는 헤이즈의 모습은 동료 드라이버의 차량 전복 사고 후 동료의 상태를 확인하고 구출하기 위해 차에서 뛰어내려 사고 현장으로 뛰어갔던 1992년 벨기에 그랑프리의 아일톤 세나와 2022년 실버스톤 그랑프리의 조지 러셀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죠.
‘전략’은 어떨까요? 경주 중계를 보는 초심자들이 한 번쯤 하는 생각이 있죠. ‘지저분한 전략으로 다른 차들을 방해하면 안될까?’ 같은 생각이요. <F1 더 무비>는 바로 그런 전략을 소니 헤이즈를 통해 다채롭게 보여줍니다. 모두의 타이어가 가장 약해졌을 때 트랙 위에 자갈을 흩뿌려버린다든지, 팀 라이벌을 묶어두기 위해 일부러 한 랩 뒤처지며 피트에서 시간을 끈다든지... 심지어 헤이즈가 벌인 고의적인 사고 전략은 F1 역사상 가장 논쟁적이었고 준 범죄 행위로까지 규탄된 바 있었던 소위 ‘크래시 게이트(Crashgate)’를 떠올리게 하며 F1 골수 팬덤의 논쟁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5강 팀이 직선 구간에서 더 빠르니 우리는 코너에서 싸울 수 있는 차량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목, 차량 바닥판(플로어 엣지) 업그레이드를 통한 성능 향상 등의 모습에서는 F1 특유의 기술과 속도의 면모를 강조해 주고 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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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의 역동성을 한데 모아 놓은 종합 선물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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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기에 한 장면만 나와도 팬덤 사이에 한 달은 회자될 만한 에피소드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한 편의 영화로 구성해 낸 이 만듦새는, F1이라는 스포츠가 보여줄 수 있는 역동성의 모든 면모를 최대한 관객에게 보여주고 말겠다는 의지까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역동성의 종합 선물세트 사이 사이에 루이스 해밀턴, 카를로스 사인츠, 막스 베르스타펜 등 실존 드라이버들의 실제 차량을 주인공이 추월해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까닭은요, 소니 헤이즈라는 가상의 드라이버에 이입된 관객들이 영화를 다 본 후에는 루이스 해밀턴, 카를로스 사인츠, 막스 베르스타펜이 활약하는 현실의 F1 팬덤으로 넘어와 주길 기대하는 리버티 미디어의 흑심이 반영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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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F1 더 무비>는 F1에 처음 관심을 갖는 ‘신규 예비 팬’이 뒤따라올 명확한 한 명의 캐릭터를 내어놓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서사인 <본능의 질주>에서는 다니엘 리카도의 좌절과 샤를 르클레르의 도전, 맥라렌의 절치부심과 하스와 귄터 슈타이너의 고민, 막스 베르스타펜의 성공 등이 이리저리 얽혀있지만, 영화 <F1 더 무비>는 이제 일곱 시즌으로 늘어져 버린 다큐멘터리의 여러 스토리라인을 축약해서 ‘소니 헤이즈의 좌절과 도전, 에이팩스 팀의 고민, 그리고 헤이즈의 성공’이라는 단일한 스토리라인으로 F1이 그간 보여줬던 드라마들을 효과적으로 요약해 줍니다.
그래서, <F1 더 무비>는 더 높은 상업적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F1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잘 스며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리버티 미디어의 미디어 스토리텔링적인 해답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담으로, 영화 개봉 이후에 이어지고 있는 2025시즌의 실제 F1경기를 보면 영화 속 장면들이 거의 유사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데요, 같은 맥라렌 팀의 드라이버들이 팀 배틀 중 사고로 동반 탈락하거나(캐나다), 경주가 시작된 직후 스타트를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차가 나오거나(오스트리아), 경쟁 차량을 들이받아 동반 탈락하는 사고가 나오고 있죠(오스트리아). 심지어 ‘내구 레이스 우승 경력은 있지만 F1에서는 3등 이상의 성적을 단 한 번도 내보지 못한 노장 드라이버가 촉망받는 신인과 만난 팀에서 꼴찌로 스타트하여 기적적인 3등에 안착하는 사례(영국)’까지 나오면서, 온 우주의 기운이 F1과 <F1 더 무비>로 몰리고 있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실이 뒷받침되어 리얼리티를 더욱 탄탄히 만들어주고 있는 <F1 더 무비>. 과연 이 영화 이후, 이야기가 견인한 F1의 날갯짓이 과연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지 지켜보는 맛이 쏠쏠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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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포뮬러원 #F1더무비 #브래드피트 #리버티미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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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익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트랜스아이덴티티 이론으로 MCU를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러 대학에서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디지털 게임, 한류 등등에 대해 가르치고 있어요. 이야기가 들어있는 여러 분야의 스토리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잡식성 스토리텔링 연구자예요.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 공간, 디지털, 게임, 브랜드, 디자인 등등을 좋아하고 연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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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한 친구가 <F1 더 무비> 정말 재밌게 봤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희의 관심은 F1 보다는 브래드 피트에게 더 쏠려 있었는데요. 도대체 뭘 했길래 여전히 저렇게 젊은 거냐며, 벌써 30년 전 영화인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가을의 전설> 속 그의 모습과 비교해가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었답니다. 방학 시즌이라 그런지 <F1 더 무비>를 포함하여 볼만한 개봉 영화가 많은 요즘인데요. 이번 주말, 무더위 날리러 영화관 나들이 어떠실까요?😉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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