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로에서 올린 ‘특별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글이 될 예정이니, 취향 아니신 분들은 스킵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공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낭만을 추구하는 분이시라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또 모르잖아요? 황폐한 마음, 말랑하게 만들어줄 낭만 한 톨 찾아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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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모든 것은 우연히 시작되었어요. 작년 새 학기가 시작될 즈음, 수업 자료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경기 대학생 뮤지컬 페스티벌’이란 공고를 발견하게 되었죠. 학교 학생들과 팀을 꾸려서 참가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참가작으로 뮤지컬 <우연히 행복해지다>를 떠올린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어요. 비전공자인 우리 팀에겐 소극장 뮤지컬이 적합하다는 판단이었고, 무엇보다도 제 배우 데뷔작이라 작품이 가진 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죠. 물론 장렬하게 예선 탈락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치부심하여 올 1월 대학로 소극장에서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상연했어요. 배우로 참여했던 작품을 연출한다는 것, 특히 제 작품을 제자들이 다시 구현해 준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죠. 그날의 공연을 원작자인 나의 연출과 15년 전 함께했던 배우들이 보러 왔고, 우린 옛 시절을 떠올리며 비슷한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참 찬란했던 순간,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들,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그래서 제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때 그 사람들 불러 모아서 특별 공연을 하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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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행복해지다> 포스터와 캐릭터 소개 / ⓒ이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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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토록 특별 공연을 원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어린 나이에 참여하느라 미성숙했던 저의 부족함을 지금의 능숙함으로 채워주고 싶었어요. 보다 완벽하게 맡은 캐릭터를 표현해서, 더 완전한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던 거죠. 이것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누누이 말했던 건데, 창작의 세계에서 노련함이 신선함을 이기기란 버거운 일이죠. 그걸 저는 금세 또 까먹고는 참 처절하게 연습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때 같이 했던 소중한 사람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어요. 연구와 강의, 일에만 파묻혀 살아가다 보니까 가슴 뛰게 하는 일이 없더라고요. 뭐 나름의 의미는 찾을 수 있겠지만, 솔직히 재미는 없어요. 다른 동료 배우들도 저마다의 삶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살아왔고, 잠시나마 해방감이 드는 재밌는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제멋대로 해석했어요. 그리고 그 쉼을 꼭 안겨주고 싶었죠.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특별 공연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된 것이.
필연적 공연을 완수하기까지 대하드라마 분량은 족히 채워질 만큼 지난한 과정이 있었지만, 참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내일이 기다려지는 설렘을 마주했죠. 그렇지만 이 공연이 우리끼리만 즐겁거나, 노스탤지어에 허우적거리는 작업으로 남고 싶진 않았어요. 콘텐츠는 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정주가 아닌 진보를 보여주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사랑했던 이 작품의 매력을 온전하게 구현하려고, 모두가 진정을 다 했던 것 같아요. 혹시나 작품의 진가가 널리 전달된다면, 다시금 세상에 나와 젊은 창작자들이 맘껏 놀 수 있는 장이 마련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품었죠. 우리가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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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요, 명색이 에세인데. <우연히 행복해지다>는 우연히 카페에 모인 여섯 명의 남녀가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며,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예요. 가수가 꿈인 소심한 남자는 용기를 얻어 데뷔를 하게 되고, 과거 오해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던 커플은 사랑을 확인하고, 어린 시절 헤어졌던 남매는 해후하게 되죠. 작은 카페 공간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렇게 연결되어 교감하고, 서로에게 용기와 사랑을 나누며 하나가 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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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제가 맡은 역할인 ‘고만해’라는 인물은 관계 연결의 중심에 있어요. 타고난 명랑함과 사교성으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어서는 해결하려 들죠. 그래서 연기하기 힘들었어요. 모든 사람들을 참견하며 하나로 만들어 나가는 일엔 많은 감정 소비와 체력이 요구돼요.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어야 가능하죠. 이런 사람 요즘엔 참 만나보기 귀한 사랑스러운 캐릭터예요.
간혹 저의 지인들은 이 캐릭터가 제게 맞는 옷이라며 연기할 것도 없겠다고 말하는데, 뭘 모르는 소리예요. 저는 선택적 휴머니스트로서 내 눈에 예쁜 사람들만 챙기지, 만인에 대한 관심 같은 건 품지 않아요. 이번에 다시 고만해를 연기하면서도 다름의 벽을 여실하게 느꼈고, 정말 연기하기 위해서 그를 연구해야만 했죠. 깊은 고민 끝에 고만해는 현실에는 없는, 환상의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우리 작품에는 주요 소품으로 라디오가 등장하죠. 작품에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지지직‘ 소리가 두 번 나오는데, 이 음향은 시간을 되감는 기능을 해요. 그중 한 번은 극이 시작될 때 십여 년 전 라디오 방송의 사연을 읽는 장면으로 안내하며, 분명한 과거로의 회귀를 보여줘요. 다른 한 번은 고만해가 카페에 들어설 때 나오며 ’만해 Style‘이란 넘버를 연결해 주죠. 현실을 가르는 균열처럼 들려온 주파수 소리는 고만해라는 캐릭터가 실존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 마음속, 혹은 갈망 속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대상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고만해는 단지 한 인물이 아니라, 깊은 사랑 그 자체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해석하고 나니 연기하기가 한결 쉬워졌죠. 환상의 인물이니까 내 맘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무방하잖아요? 또 한편으론 약간의 책임감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왔어요.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려면 더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리! 사지가 부들부들 떨려도 사명감으로 참아냈죠. 그러다 문득 고만해라는 캐릭터가 내 옆에 존재한다면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관계 단절의 시대, 아니 관계라는 것을 더 이상 맺지 않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인물 아닌가요? 고독한 현실 세계에 고만해 몇 명만 풀어놓는다면, 소외니 갈등이니 하는 것들은 사라질 텐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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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어머니는 제가 공연을 할 때마다 이야기하셔요. 돈도 안 되는 거 왜 하냐고. 참 일리 있는 말씀이라 늘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어요. 이번 작업도 그랬어요. 연습을 진행하면서 여러 부침을 겪을 때면, 이따금씩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죠. 나 이거 왜 하지? 콘텐츠를 하는 근사한 명분이 찾아지길 바랐어요. 대단한 부와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엄청난 의미를 찾는 것도 아닌데, 왜 꾸역꾸역 콘텐츠를 하고 있을까요.
사실 이번 공연을 통해서 엄마에게 설명해 줄 멋진 답을 찾진 못했어요. 그러나 하나 얻은 것은 있죠. 바로 콘텐츠를 매개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하나 되는 순간을 목도했다는 것이에요. <우연히 행복해지다>라는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올랐으면 좋겠다는 일념 아래, 나의 연출과 음악감독, 선배 배우들, 제자들, 지인들, 그리고 관객들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열의와 정성을 쏟아냈어요. 여기에는 사심이나 조건이 없었기에 더 아름다웠죠. 이런 광경은 생애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하나의 콘텐츠를 위해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것을 보면서, 진심으로 삶의 감사함을 느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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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고민은 이 감사함을 어떻게 되갚을 수 있을지가 문제예요. 일단은 공연에 참여해 준 배우 선배들과 스텝으로 참여한 제자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려고, 얼마 전 엠티를 추진해서 다녀왔어요. 공연만큼이나 재미난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건데, 세대 통합 별거 없더라고요. 차차 감사함을 갚아나갈 계획인데, 콘텐츠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요. 콘텐츠는 누군가에겐 꿈이고, 누군가에겐 일이고, 누군가에겐 쉼일 수 있잖아요. 그 다양한 사람들의 가치가 실현되는 현장을 조성하는 것, 꽤 괜찮은 채무 상환 계획이 아닐까요? 제가 콘텐츠를 하는 명분도 되고 말이죠.
콘텐츠를 한다는 것, 삶의 감사함에 보답하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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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 No.12 2023.10.25. 콘텐츠를 한다는 것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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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한신대학교 인문융합대학 조교수. 영화, 공연, 방송, 연기 등을 연구해요. 삶의 미(美)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콘텐츠도, 학문도, 인간 사회도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전형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고, 새로움과 솔직함을 추구해요. 자유를 억압하는 세상에서 참신하고, 유니크하고, 이상한 것들이 넘쳐날 수 있도록 활동하고 있어요.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와 한국영화학회의 학술이사를 맡고 있고, 단편영화 감독과 공연 연출을 하고 있어요. 언젠가 나다운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울림을 주고 싶은 것이 궁극적인 꿈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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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질문 앞에 끊임없이 고민 중이신 이태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저 역시도 나에게 콘텐츠란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겐 꿈이고, 누군가에겐 일이며, 누군가에겐 쉼인 콘텐츠. 여러분에게 콘텐츠란 무엇인가요?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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