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아이언 하트>(Disney+, 2025)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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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울버린… 대체로 이런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우리는 관습적으로 ‘슈퍼히어로물’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슈퍼히어로’라는 단어를 보면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뭔가 ‘이것은 어쨌든 영웅서사일 거 같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죠. ‘히어로’라는 단어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 최근에 새롭게 론칭된 마블의 슈퍼히어로물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이언 하트>인데요. 그런데 이 드라마, 참으로 수상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니, 이거 정말 슈퍼 ‘히어로물’ 맞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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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캐릭터, 리리 윌리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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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악씨레터를 통해 여러분께 띄웠던 글, ‘슈퍼히어로물, 현대의 신화인가 현대인의 자화상인가’에서 저는 최초의 현대적 슈퍼히어로 캐릭터인 슈퍼맨의 이름에 대해 언급하면서 오늘날의 슈퍼히어로물이 ‘이상적 인간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그러고 보니 악씨레터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 뵌 지도 어언 일 년여가 흘렀네요! 안녕히 잘 지내셨나요?). 그런데 이 디즈니플러스의 최신 드라마 <아이언 하트>를 보고 있노라면 도대체 이 제작진들은 주인공 리리 윌리엄스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그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나 한 것인지 강한 의문이 든단 말이죠?
논의의 편의를 위해 먼저 이 에피소드 여섯 개짜리 드라마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의 로그라인은 “돈을 벌려고 범죄조직에 입단한 공학 천재 리리 윌리엄스가 자기 안위를 위해 조직을 배신하고 범죄조직 보스와 흑마법 대결을 펼쳐 승리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어... 수많은 물음표를 낳게 하는 로그라인입니다만, 어쨌거나 이 드라마를 다 본 후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입니다. “리리 윌리엄스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다”라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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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Disney+ / Marvel Telev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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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처음 등장할 때의 정체성과 마지막 대단원에서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캐릭터이긴 합니다. 즉, 리리 윌리엄스는 아이덴티티 브릿지를 건너는 트랜스아이덴티티 캐릭터이기는 해요. 문제는 그 브릿지를 건너는 과정에서 아무런 ‘이상적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언 하트> 속 리리 윌리엄스의 이야기에는 영웅적인 선택이나 영웅적인 행동은 사실상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리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선택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 선택이 설령 대중윤리를 저버리는 것일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리리 윌리엄스가 슈퍼 ‘히어로’ 캐릭터가 아니라는 사실은 비교적 자명합니다. 리리 윌리엄스라는 주동인물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에 의해 점차 악당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결국 <아이언 하트>는 마지막 화에 이르면 ‘독특한 악당’의 탄생기이자 나름 잘 구성된 피카레스크물로 귀결되어 버리고 말아요.
그렇습니다. <아이언 하트>는 꽤나 선명한 피카레스크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을 둘러싼 많은 논란과 불호의 입장들이 튀어나오고 마는데요. 이렇게 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아이언 하트>라는 캐릭터와 서사가 놓여있는 지형적 맥락의 니즈를 리리 윌리엄스라는 캐릭터와 서사가 온전히 채워주질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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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지점들이 결여된 매우 잡(雜)스러운 캐릭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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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의 아이언 하트는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의 자장 안에 놓인 캐릭터입니다. 토니 스타크가 어떤 캐릭터입니까? MCU의 토니 스타크는 MCU라는 세계관을 손수 만들고 지켜낸 캐릭터입니다. 인피니티 사가라는 유려한 이야기 위에 살다가 완벽에 가까운 결말을 맞이한 캐릭터 토니 스타크는 그 완결성으로 말미암아 이제 섣불리 되살리기도, 극복하기도 까다로운 위대한 유산 반열에 올라가 버리고 말았죠. 최근 수년간 MCU의 서사가 망가지면서 그만큼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했고 말입니다.
이 와중에 리리 윌리엄스가 ‘아이언 슈트를 자력으로 만들어낸 천재 공학자’로 묘사된다? 바로 그 순간, 이 캐릭터는 필연적으로 토니 스타크의 후계자로서 적합한지(혹은 적법한지)를 묻는 수많은 의혹의 시선들 앞에 서게 됩니다.
하지만 리리 윌리엄스는 토니 스타크의 후광을 물려 받는데 실패합니다. 아니, 오히려 토니의 후계 자리에 관심이나 있었나 싶을 정도의 행보를 보이면서 중요한 지점들이 결여된 캐릭터 성을 입어 버리고 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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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Disney+ / Marvel Telev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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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리리 윌리엄스는 토니 스타크의 기술력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합니다. 뭐 초천재 재벌 2세 기업가와 초천재 학부생을 비교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냐 싶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리의 ‘부족한 기술력’이라는 이 설정이 그의 캐릭터 빌드업을 꼬아버리는 주된 계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리리는 대학의 재료 제공이나 자금 지원이 없이는 슈트와 AI를 만들지 못합니다. 게다가 슈트의 동력원도 스스로 만들지 못합니다(TMI지만 조악한 수준의 대체 동력원이나 ‘짝퉁 아크 리액터’는 이미 <아이언맨2> 시점에 북한, 이란, 저스틴 해머, 이반 반코 등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하여간 이런 상황은 리리의 독선적인 성격과 맞물리면서 ‘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데 단지 돈이 부족해서 못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그의 기술력 부족은 그가 비행의 길로 빠져드는 데 자기합리화의 도구가 되어주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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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Disney+ / Marvel Telev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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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리리 윌리엄스는 토니 스타크의 윤리의식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합니다. 토니 스타크도 독선적인 면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캐릭터였지만, 최소한 자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에 대해서는 설령 그것이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더라도 스스로 책임지고 결자해지 하겠다는 정의관이 확고히 정립된 인물이었죠. 초기의 아이언맨 슈트도 기실 자신의 회사가 자기 몰래 진행했던 무기 암거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반면 리리 윌리엄스는 ‘돈이 많이 부족하다 →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범죄조직에 가입한다’라는 기적적인 논리를 앞세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는 기꺼이 범죄의 길에 들어섭니다. 심지어 대단원 부에서는 이전에 사망한 자신의 오랜 친구를 되살리기 위해 무려 악마와 계약을 하기까지 하죠.
리리는 아이언 슈터로 활동하는 자신에 대한 자기 정체감이 부족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아이언 슈트’를 왜 만들었느냐는 주변인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리리는 뚜렷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단지 이렇게 답변할 뿐입니다. “만들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리리는 극중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도 하는데요, “난 슈트 없인 우리를 못 지켜요. 그래서(슈트가 없는 지금, 이 자리를 피해서) 떠나야 해요.” 이러한 리리의 대사와 자기 인식은 토니 스타크가 피터 파커에게 그렇게 강조했던 가르침, “슈트 없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더더욱 슈트를 가져서는 안 돼.”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죠.
셋째, 리리 윌리엄스의 서사는 토니 스타크 서사의 ‘기술 서사적’ 특징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합니다. ‘아이언맨’ 시리즈는 테크노 스릴러 풍의 기술 경쟁 서사를 그 근간으로 두고 있습니다. 참고로, 고대 신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 속 주인공과 악당 간의 기본적인 관계는 ‘동종 이형 간의 경쟁 서사’라고 할 수 있는데요, 가령 그리스 신화의 올림포스 12신은 자기들과 유사한 티탄이나 기간테스 같은 거인 신과의 결투를 벌이고, 북유럽 신화 속 라그나로크에서는 신들 간의 혈투가 묘사됩니다. 심지어 유일신교인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야훼 하나님과 대립하는 존재로 신과 유사한 속성을 지닌 사탄을 상정해 둘을 대립시키곤 하죠. 이야기의 이런 특성은 ‘아이언맨 시리즈’에도 적용되는데요, 아이언맨이 대립한 빌런을 보면 아이언 몽거(<아이언맨>), 해머드론과 위플래시(<아이언맨2>) 등 주동인물과 거의 동일한 파워드 슈트이거나 첨단 바이오 생명공학 기술(익스트리미스/<아이언맨3>) 같은 최소한의 ‘기술적 산물’이었습니다. 토니 스타크가 대립한 상대 중 가장 기술에서 먼 적이라면 타노스를 들 수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타노스는 마법보다는 무력을 앞세워 아이언맨에게 대항했었죠.
그러나 <아이언 하트>는 이러한 구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아크리액터를 재현해 내지 못해 슈트에 충분한 동력을 확보할 수 없었던 리리는 무한한 동력원으로 흑마법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간 흑마법을 사용하던 범죄조직 보스와의 최종전은 자연스럽게 마법 대결의 양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이런 리리의 모습은 여러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체감한 한계점과 문제점을 다음 슈트에서 기술적으로 개선해 나가던 토니 스타크와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죠. 마법과 짝지어진 기술이라...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혹시 단편의 완결된 서사를 넘어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 속에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시네마틱 유니버스 속 일개 창작물의 숙명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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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인 줄 알았더니 ‘머신 스피릿’
도대체 마블은 리리 윌리엄스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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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이제 슬슬 ‘아이언 하트/리리 윌리엄스’라는 캐릭터를 굳이 이런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는 마블 측의 의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할 지경입니다. 리리 윌리엄스는 토니 스타크의 모든 ‘좋은 면’ 들을 죄다 비틀고 뒤틀어서 반대로 그려내고 있는 일종의 ‘거울 쌍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코믹스 기준으로는 토니 스타크보다는 오히려 닥터 둠에 가까운 행보를 걷는 것이 <아이언 하트>의 리리 윌리엄스인데요, 이쯤 되면 아이언 하트/리리 윌리엄스는 아이언맨/토니 스타크를 계승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고 하겠습니다.
이 드라마를 살펴보면 제작진들도 리리의 행동이 히어로보다는 빌런에 걸맞은 것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는 리리에게 범죄조직 보스의 입을 빌어 “너의 행동은 범죄”라고 단정 짓고 있거든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마블은 귀중한 드라마 한 시즌을 통째로 할애해 가며 MCU 세계관에 일개 빌런 캐릭터를 소개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이 페이즈 5인지 6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서사의 중심축이 되어줄 메인 캐릭터나 메인 스토리가 부재한 것이 MCU 타임라인의 현주소인데, ‘아이언 하트/리리 윌리엄스’의 존재 의미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속에서 과연 어떤 위상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걸까요? 현재까지 주어진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해가 쉽게 가지 않는 드라마가 바로 이 <아이언 하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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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Disney+ / Marvel Telev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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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피스토와 계약하며 흑마법사 포지션을 갖게 된 아이언 하트/리리 윌리엄스는 아이언 슈트를 입고 있음에도 이제 ‘닥터 스트레인지’ 시리즈의 빌런에 오히려 더 적합할 캐릭터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술 기반 캐릭터도 아니고, 마법 기반 캐릭터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역도 아니고, 확실한 악역인지는 아직까지는 모호한, ‘아이언 하트’는 그야말로 잡(雜)스러운 캐릭터가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잡(雜)스럽다는 것은 흔히 천박한 것이라 오해를 사곤 하지만, 실은 경계가 모호하고 잘 섞여 들어가기 쉬운 것을 의미합니다. ‘토르’ 시리즈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마블의 세계에서 마법은 ‘고도화된 과학’과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지요. 향후 이 아이언 하트/리리 윌리엄스 캐릭터가 과학과 마법을 하나의 단일한 관점으로 융합시키는 열쇠 역할을 하게 될지, 아니면 판만 벌여놓고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 퇴장해 버리는 ‘잡졸’ 수준에 그치고 말지, 매우 귀추가 주목된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캐릭터라고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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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하트 #리리윌리엄스 #슈퍼히어로 #마블 #MC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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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익 경희대학교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학술연구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트랜스아이덴티티 이론으로 MCU를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여러 대학에서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디지털 게임, 한류 등등에 대해 가르치고 있어요. 이야기가 들어있는 여러 분야의 스토리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잡식성 스토리텔링 연구자예요. 영화, 애니메이션, 웹툰, 공간, 디지털, 게임, 브랜드, 디자인 등등을 좋아하고 연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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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악씨레터를 읽고나니, ‘아이언 하트’의 캐릭터성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익숙한 영웅 서사를 따르기보다는, 정체성의 경계에 서있는 새로운 인물을 그리려는 시도가 엿보이는데요. 그 의도와 방향은 다음 시즌에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4기에 이어서 9기에도 다시 함께해 주신 김세익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한 달 뒤 또 어떤 흥미로운 콘텐츠 이야기를 들려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ditor 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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