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씨 뉴스레터 Vol.1 No.4 2023.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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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때 아닌 무대 위 '가짜' 논쟁이 일었어요. 발단은 배우 손석구가 연극 <나무 위의 군대>를 통해 오랜만에 무대에 복귀하면서 기자간담회 중에 했던 말에서 시작됐어요. 영화와 연극의 연기 차이를 묻는 질문에 과거의 연극 경험에서 느꼈던 바를 설명하면서, 연극 연기가 가짜라고 표현한 발언이 문제가 됐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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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감독님들이 사랑을 속삭이라고 하는데 그럼 마이크를 붙여주던지 '왜 그렇게 가짜 연기를 시키나' 싶더라. 다시 연극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드라마와 영화에서) 하는 연기를 연극에서 해도 괜찮은지 보고 싶었다. 연극 스타일로 바꾸면 연극을 하는 목적 중 하나를 배신하는 느낌이라 (매체 연기와) 더욱 똑같이 하고 있다." (연극 '나무 위의 군대' 기자간담회/2023.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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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인 세상에서 '리얼'을 찾는 모순
손석구의 발언이 논란으로 확대된 것은 원로배우 남명렬이 SNS에 저격 글을 올리면서였어요. "진짜로 속삭였는데도 350석 관객에게 들리게 하는 연기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대선배 남명렬의 일침은 한순간에 손석구를 오만한 후배로 만들기 충분했죠. 이후 떠벌리기 좋아하는 언론은 둘의 발언을 대단한 논쟁인 양 부풀렸고, 인터넷의 대중도 둘로 갈려 갑론을박을 펼쳤습니다.
논란을 접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손석구가 연극을 해? 그럼 보러가야지!"였어요. 고백하자면 저는 손석구의 오랜 팬입니다. <나의 해방일지>로 매스컴이 유난을 떨기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배두나와 연인으로 나왔던 <센스8>부터 눈여겨봐왔죠. 손석구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일단 마스크가 신선했고, 대사의 톤과 호흡이 남다른 데가 있었고, 인물 표현력이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자면 연기와 삶에 나름 철학이 있어 보였고, 이를 소신껏 말할 줄 아는 게 멋있었어요.
저는 논란을 다룬 기사를 보고, 우습지만 당장 티켓을 예매했어요. 저에겐 '가짜' 연기 논란보다 좋아하는 배우의 연극 출연 소식이 더 가슴에 와 닿았거든요. 실은 저도 뭐 대단한 배우는 못되지만 연극과 매체를 넘나들면서 연기를 했던 사람으로서, 연기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왔던지라 새삼스럽지도 않았어요. 연극을 하다 매체로 넘어갔을 때는 손석구처럼 매체에 따른 연기의 차이를 깊이 고민한 적도 있고, 연기 안에서 리얼한 것(저는 '진짜'란 단어보다 '생동감'이란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만)을 찾아 헤매기도 했어요.
젊은 배우가 연기하다 보면 치기 어린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건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나 애석한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남명렬 배우의 지적이 온당했어요. 연기라는 게 허구를 표현하는 행위인데, 그 안에서 진짜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본질에서 벗어난 모순이죠. 대배우 이순재 선생님의 말씀처럼 "연기라는 게 원래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건데 말이죠. 연기에는 진짜란 있을 수 없고,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표현만이 존재할 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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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본질은 연기가 아니라 희곡이야
연극 <나무 위의 군대>를 보러 갔어요. 논란을 접하고 간지라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연기 중심으로 극을 보게 되었어요.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를 실제로 본다는 설렘과 내심 손석구가 멋지게 연기를 펼쳐서 상황을 타개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어요. 그러나 연극을 보고난 저는 외려 그 발언이 또렷해졌어요. 거창한 포부에 비해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연기에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연극이 시작되고 처음 의아했던 건 배우 볼에 붙어있는 마이크였어요. 객석 규모가 꽤 커서 그랬는지, 손석구의 말처럼 리얼한 연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스피커를 통해서 듣는 연극 대사란 참 생소했어요. 무엇보다 연기 앙상블이 기묘했어요. 명료하게 얘기하면 세 명의 배우가 나오는데, 한 명은 그냥 그런 연극 연기를 하고 있고, 한 명은 애써 연극 연기를 흉내 내고 있고, 손석구는 늘 보던 매체 연기를 했어요. 셋의 표현이 한데 어우러지지 못하고 각기 노는데, 마이크를 착용한 것만큼이나 이상했습니다.
손석구의 발언을 곱씹어 보았죠. 저는 가짜 연기라는 표현보다 뒤에 덧붙였던, 연극에서 매체 연기를 실험하겠다는 말이 더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았어요. 흔히 연극을 배우의 예술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연극 예술의 원천은 바로 희곡이에요. 연극은 희곡의 창조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이고, 배우는 작품의 의도와 사상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도구의 일부일 뿐이에요.
연극의 본질은 연기가 아니라 희곡입니다. 작품의 가치를 고취하는 대업의 과정에서 일개 배우의 연기 실험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연기는 작품의 고유성에 입각해서 형성되는 것이지, 배우 개인의 의지로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에요. 글쎄요, 이 연극이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을 의도했다면 모를까, 결과적으로 불화의 연기 앙상블은 잘못된 게 분명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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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손석구다움'을 추앙하며
가짜 연기 논란을 의식한 듯 손석구는 어느 매체의 인터뷰를 통해 사과를 표명했죠. 근데 어쩐지 저는 그 모습이 손석구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자신의 소신을 접고 여론에 타협한 느낌이 들어서요. 돌이켜보면 발언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배경에는 연기를 향한 손석구의 고뇌와 열정이 자리하고 있어요. 외운 대사를 영혼 없이 읊어대는 젊은 배우들 속에서 귀중한 존재 아닌가요?
연기의 본질을 찾는 길에 때론 거친 생각을 할 수도, 때론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로 제 갈길 가는 게 '손석구다움'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처럼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 없이 사는 세상에서 손석구의 행보는 귀감이 될 만해요. 제가 좋아했던 손석구다움이 지금은 부침을 겪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가 지닌 비전형적이고 자유분방한 매력이 연기의 본질을 꿰뚫기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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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한신대학교 디지털영상문화콘텐츠학과 조교수. 한국영화, 장르영화, 스토리텔링, 공연예술, 연기예술, 문화콘텐츠 이론, 정체성 등을 공부하고 있어요. 삶의 미(美)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콘텐츠도, 학문도, 인간 사회도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어요. 전형적인 것과 틀에 박힌 사고를 싫어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대상과 관계 맺고 싶어 해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적대하며, 이 세상에 참신하고, 유니크하고, 이상한 것들이 넘쳐날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총무이사, 한국영화학회 편집위원을 맡고 있고, 단편영화 <에스프레소 더블샷>, <분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를 각본/연출로 찍었습니다. 언젠가 장편영화로 입봉하여 많은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꿈이에요. 획일화돼 가는 세상에서 나다움을 바로 알고, 나만의 이야기로 세상을 마주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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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악씨레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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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덥지만, 요란한 매미 소리 대신 고요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 더위도 곧 끝이 날 것 같습니다. 8월 한달간 매주 수요일에 만난 악씨레터의 다양한 시선😁😉😊😎 어떠셨나요?
9월에도 😁😉😊😎과 함께 합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함께 만들어가는 악씨레터를 꿈꾸며... 여러분의 소중한 피드백을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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